*본지는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Ph. D.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의 논문 '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3.1운동 이방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
4. 대한민국의 건국과 3.1정신의 계승·발전

1) 건국과 건국정신

(1) 건국

① 해방과 남북의 분단과 한국교회

3.1운동 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나 갈수록 군국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동화 정책이란 이름 아래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민족 말살정책을 펼쳤다. 창씨개명, 징집을 강요하고 정신대까지 차출하였다. 명치헌법의 천황제에 따라 한국에 일본의 전통종교인 신도를 확대하기 위해 도처에 신사를 세우고,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끝까지 저항하였다. 한국의 개신교는 일본교단 안으로 통합되었다. 독일과 이태리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에까지 세력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반격으로 인해 독일을 필두로 군국주의 국가들이 망하게 되어 일본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하여 마침내 1945. 8.15 무조건 항복하였다.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은 되었으나 자유 독립국가의 건국은 바로 이루어지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군이 남북한을 점령하였다. 맥아더장군의 소련 팽창정책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 루즈벨트의 친소정책의 여파로 소련은 뒤늦게 2차 대전 말미에 참전하였다. 그렇지만 미군보다도 한 달먼저 8월 9일 북한에 진주하였다. 소련군이 계속해서 남하하자 방어면에서 한국을 별로 중시하지 않던 미국은 본스틸(Charles H. Bonsteal)과 딘 러스크(Dean Rusk) 두 대령에 의해서 정해진 38선을 경계로 소련군은 남하를 멈추게 하고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북한에서는 연해주 관구의 군사위원장인 상장 슈티코프(Terentyi Fomich Shtykov) 휘하의 소련군정이, 남한에서는 연합국 주일 점령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휘하의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945년 9월 7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미국 태평양 지구(U.S. Army Forces Pacific)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명의로 남한이 그의 권한 아래 있다고 하는 포고령 1호를 발표하였다. 더불어 하지(John R. Hodge) 중장을 수반으로 하는 재남조선미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이후 미군정)을 설치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시행되었다. 이북은 소련군정의 주도 아래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을 순차적으로 진행하였다. 미군정 아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 '남조선 과도정부'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민주당(1945년 9월 16일 창당, 한민당) 및 사회민주당과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정파와 사회단체들이 난립되어 각축전을 벌였다. 기미년(1919)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은 상해 임시정부 측의 건국 주도론에 맞서 중도를 표방한 여운형, 김창준을 중심으로 '조선 건국준비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자국민의 선거에 의한 정부 외에는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미군정은 상해의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 조직 때문에 우파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그 후 여운형은 남로당 당수가 되었으나, 곧 박헌영 세력에 의해 밀려났다.

1945년 말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남북한에 대한 신탁통치 안이 대두되었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를 거치고 강대국의 이해가 교차되므로 연합국이 공동 관리하는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울에서 미국영사로 근무했고 후에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 측 대표단에 합류했던 랭던(William R. Langdon)은 한국인의 문맹률이 90%란 점에서도 자치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탁치안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한다는 소련측 안을 채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세력이 확대되자 미국의 정책은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한 일본 중심의 방어책으로 전환되었고, 한국에 남한만의 정부라도 세운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찬탁을, 남한은 반탁을 주장하면서 극한 대립이 이루어졌다. 해방 직후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공산주의 체제냐를 둘러싸고 양분된 상황에서 찬탁과 반탁 문제 까지 결부되어 테러와 폭동으로 사회는 더더욱 불안하였다. 이승만은 찬탁에 반대하며 완전 독립을 주창하였고 공산당에 대한 반대 입장도 분명히 하였다. 일각에서는 왕손인 전주 이씨를 내세워 왕정복고를 꿈꾸는 복벽주의(復辟主義)자들도 있었다.

최재건
▲최재건 박사
그런 와중에서 해방 후 국내에서는 처음 맞는 1946년 제27회 3.1독립운동 기념식도 좌우로, 대한과 조선으로 나뉘어 '기미'파와 '삼일'파로 양분되었다. 우파는 보신각에서 김구, 김규식, 이승만, 오세창 등과 함께 그때의 정신을 기렸다. 이승만은 3.1운동이 세계 최초의 비폭력 혁명이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 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하자"고 기념사를 하였다. 좌파는 다시 양분되어 한편은 남산 공원에서 기념식을 가졌고, 다른 한편은 파고다공원에서 허헌, 이강국 등의 참석리에 기념식을 가졌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기념식을 주도하면서 정치체제를 쟁점화하였고, 교회들은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다.

이북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굳어지며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피난민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는 미·소의 군정으로 전국적인 총회를 소집할 수 없어 1945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열어 완전한 조선독립을 촉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키로 결의하였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건과 조직에 매진해야 하는 새 국면을 맞았다. 이때에도 교회 조직은 3.1운동 때처럼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유일한 전국적인 연락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해방 정국의 3거두인 김구, 김규식, 이승만도 이 대회에 참석하여 기독교정신으로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독립촉성기독교 중앙협의회'가 조직되어 건국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해 미국은 봉쇄정책으로 맞서 한국은 동서 냉전의 최 전초 각축장이 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남북한의 첨예한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자 미국은 유엔에 한국문제를 이관 상정하였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의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고, 3월에는 1948년 5월 10일이란 일정을 확정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