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대학장/성령의 삶 코스 대표)
이용도는 개인적인 성령의 직접적 인도하심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의 삶 속에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신념 속에서 행동에 옮긴 일들이 많이 있었다. 변종호는 이에 대해 "이용도 목사는 정말 주님의 지시나 음성에 접하기를 바라고 그저 어린이 같이 그저 바보 같이 만사(事)와 만성(聲)을 눈으로 지켜보고 귀 기울여 공손히 듣는 생활에 돌아버리고 열광했다."고 평했다. 그런데 이용도는 때로는 상식과 기록된 말씀의 범주를 벗어난 주관적 '계시' 체험을 중시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 당혹스런 일들을 겪게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는다고 예배 해산 광고를 하거나, 이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설교하지 말라고 하신다면서 초청된 교회에서 아무 말도 않고 내려오는 경우 등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영성에 대한 관념 속에는 금욕적 형태의 신비주의 요소가 깃들어 있었다고 본다. 그는 "육(肉)에 죽고 영(靈)에 살자"고 함으로서,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죄 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육이 멸시를 당할 때 영이 윤택하여지나니 영의 적은 육이니라. 영을 살리려면 육을 죽이라. 영의 생은 육의 사(死)에 있으니, 영이 안식하려면 육에 고난을 주라. 영이 귀하려면 육을 천(賤)케 하라." 이러한 그의 이원론적 관념은 그의 생활에 적지 않게 반영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 당시 한민족이 지닌 재래적 심성 속에 아직 유불선(儒彿仙) 종교의 영향이 많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이용도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의 재래적 심성에는 오랜 동안 유불선(儒彿仙) 종교와 샤머니즘을 수용한 탓에 혼합주의적 영성이 삶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문화의 영향으로 이기주의, 타계주의, 의타주의, 권위주의적 계율주의, 기도만능주의, 신선의식  등이 심성 속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교회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는 신조와 교리에 너무 치우쳐서 생명력을 잃었다고 비판하였다. "당시의 교회 상황을 본 이용도는 이를 비판하며 조선교회에 있는 것이란 말질, 시기, 분쟁, 분열, 이기심 등이요, 없는 것은 기도, 사랑, 감사, 찬송, 협동, 봉사 등이라 했다. 전적으로 '예수의 피를 버리고 그 형식만 취하는 현대 교회'라 했다." 그의 솔직하고 두려움 없는 직설적 설교는 당시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 깊은 내면적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큰 회개와 각성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이용도는 당시 교계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장로교 황해노회와 평양노회에서 이용도 목사에 대한 금족령(禁足令)을 내린 데 이어, 마침내 범교단적으로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용도가 한국교회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비록 그에게 나타난 성령론적 오류들과 금욕주의적 경향성들이 복음적으로 볼 때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단지 이러한 점들 때문에 그를 이단시 했을 것인가? 영성운동에 있어서 재래적 심성과의 교류로 인해 일반적으로 혼돈이 심했던 1930년대의 한국교계의 상황에서 볼 때 이용도의 성령론이나 금욕주의적 성향만을 지적하여 이단시 하였다고는 믿기 어렵다.

오히려 이 모든 것보다도, 필자는 이용도가 과도할 만큼 강조한 갱신주의적 교회론이야말로 당시 교계 지도자들의 반감과 비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본다. 장로교 황해노회나 감리교 경성지방교역자회의 이용도에 대한 비판 내용을 보면 이 점이 여실이 드러난다. 장로교 노회에서의 이용도 비판 내용에는 다음과 같이 교회론에 관계되는 내용이 있다; 설교 중에 교역자를 공격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혼란시킨다. 그를 부흥회 강사로 세우면 그 교회 담임목사가 푸대접을 받는다.   

종합적으로 볼 때, 1930년대 한국교회의 영성에는 전래 종교들의 영향을 받은 재래적 심성과의 교류와 마찰로 인해 혼선이 심했다. 그러던 중 한편으로는 교회의 갱신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깊어가면서 마침내 네오-몬타니즘의 특성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1930년대를 네오-몬타니즘이 교계에 풍미했던 시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순화나 황국주나 백남주 등에 비해 이용도의 영성은 네오-몬타니즘의 특성이 좀 약한 강도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또한 그런 까닭에 오히려 이용도의 영성은 현대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용도의 신앙 실천 속에는 신앙인들이 쉽게 넘나들 가능성이 있는 네오-몬타니즘과의 경계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현재까지 많은 교계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용도를 한국교회를 교란시킨 이단의 범주에서 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에 관한 적지 않은 저술과 논문들을 중심으로 그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활발히 진행되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