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국 의사 ‘올리버 골드스미스’처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2-13)”.
의원은 예수님을,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을, 병든 자는 죄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은 오만한 독선주의자들보다 하나님의 백성 중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을 부르시는 데 있었기에, 친히 죄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외식과 겉치레와 의(義)를 멀리하고, 겸손하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오롯이 믿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죄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봅시다. 제사는 원래 죄를 용서받기 위해, 혹은 감사드리기 위해 드려지는 것이었지만 형식화되고 말았고, 이에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의 의무를 지키는 것보다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엄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긍휼을 베풀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와 의술은 오랫동안 동반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선사시대는 물론이고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의술의 종교적·초자연적 특성은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경전이자, 신구약 시대의 삶을 증언하는 역사서입니다. 따라서 신학적·종교적 해석과 더불어 역사적 해석도 가능하고, 필요합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질병과 치유, 그리고 환자 이야기가 풍부해 의학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특히 구약 성경에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개인과 집단의 죄에 분노한 신의 징벌로 묘사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을 만드시고,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여자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며 네가 진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하셨습니다.
요컨대 의학사적 관점에서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질병과 치유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그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도 기록돼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이 환자를 치유하는 기적이었습니다.
기적의 수는 분류 방법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사복음서에 기록된 37가지 기적 가운데 치유 기적이 26가지로 70%나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이 밖에도 많지만,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에 그 책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불과 3년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데는 치유의 기적이 크게 작용했다는 해설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질병과 치유의 문제는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이 예수님 제자들 역시 치유 은사를 받아 고통과 질병에서 포로 된 자들과 신음하는 자들을 치유해 주는 놀라운 사건이 있었고, 이 시대에도 그런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구약 시대 병마로 신음하는 백성들이 오롯이 믿음 하나로 고침을 받았던 사건은, 물질만능으로 교만해진 이 시대 의사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얼마 전 지인이 보내온 글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위대함’으로, 책 <희망의 씨앗을 파는 가게> 중 한 이야기입니다. 영국 한 시골병원에 초라한 행색의 부인이 찾아와 애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지금 제 제 남편이 죽어갑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의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왕진가방을 챙겨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께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지금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의사가 대꾸했습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사람부터 살려야지요!” 의사는 즉시 부인을 따라 어느 낡고 초라한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누워 있는 남편을 서둘러 진찰한 뒤 말했습니다. “큰 병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병원으로 돌아온 의사는 부인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습니다. “이 상자를 반드시 집에 가서 열어 보세요. 이 안에 적힌 처방대로 하면 남편의 병은 금세 나을 겁니다.”
부인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 집에 돌아와 그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상자 안에는 처방 약 대신 한 뭉치의 지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쪽지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처방전~ 남편 분은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이 돈으로 뭐든 드시고 싶은 음식을 사드리세요,’
부인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오랫동안 그 처방전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부인에게 친절을 베푼 이 사람은 바로 평생 사랑의 인술을 펼친 유명한 영국 의사 ‘올리버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 1728-1774)’였습니다.
이 위대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위대한가요? 사람들은 왜 그를 위대하다고 할까요? 무엇이 그를 위대해 보이게 할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과 성실함을 한평생 변함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의사 올리브 골드스미스처럼 자신의 사명을 정확히 알고, 그 사명에 기꺼이 순응하며, 예수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애쓸 때 비로소 병자를 돌볼 수 있는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의사들의 작태는 의사로서의 사명자들로 보기 힘듭니다. 우리나라 의술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사람을 살려보려 무던히 애쓰며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한 영혼이라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선배 의사들의 희생에 대해 그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이 불러온 의술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의사는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서서히 사라질 것이며, 자신의 사명을 외면하는 의사는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지금 나라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태의 주인공들인 의사는 먼저 자신들의 마음의 병부터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치유한다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기계를 고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사들이라면 자기 식구들의 병을 고치듯 전심을 다해 환자들을 돌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보살피는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의료계가 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 15:12-14)”.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친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지금도 의사협회 간부들은 정부를 향해 공갈 협박으로 일관합니다.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니 더 힘을 얻어 막무가내로 정부를 공격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병을 고치는 의사는 ‘내 편 네 편’이 없습니다. 오롯이 공명정대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으로 자유롭게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파수군으로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사랑하는 방법은 주고 받는 것입니다. 영어로 ‘Give&Take’, ‘내가 줬으니 너도 줘야지!’라면, 주님의 사랑법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최고 경지의 사랑법’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용서와 화목, 신실한 회개를 통한 십자가 사랑인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왜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 이것을 더 큰 사랑이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친구’란 도대체 누구일까요?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나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친구를 존중하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친구의 약점을 참고 견디며, 비난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으며, 나아가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저절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말과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물질보다 가난한 마음을 담아 환자들 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을 뒤흔드는 고통을 당하는 그들을 손수 찾아가셨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거의 절망 상태였던 불치병들을 금전이나 물질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어둠에서 빛의 삶으로 역전시켜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역시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오롯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쳐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평생 사랑의 인술을 펼친 영국의 유명한 의사 올리브 골드스미스는 자신에 대한 정직과 성실을 평생 변함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위대한 의사로 칭송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오늘날 의사들은 성숙하지 못한 행동들을 스스로 물리길 바랍니다. 처음 의사가 됐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 가장 우선순위로 사람들의 생명부터 살리며, 그들의 친구로 다가가는 존경스런 의사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