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담임)

요한 칼빈(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에 있는 누아용(Noyon)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누아용시 감독의 재정 비서였고 어머니는 현숙하고 경건한 여성이었다. 1523년(14세) 파리대학에 들어가 인문과학을 공부한 후 1528년(19세)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병을 얻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의 두뇌는 뛰어나게 명석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칼빈은 얼마 동안 법학을 공부했으나 그는 인문과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희랍어, 히브리어 및 고전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1532년(23세) 세네카의 작품인 「자비론」(On Clemency)에 대한 주석을 저술하여 출판했다. 칼빈은 많은 돈을 들여 이 책을 출판함으로 유명해지기를 기대했으나 아무도 그의 저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칼빈이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를 맹목적으로 찬양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기는 했다. 그 결과 스토아적 사상이 칼빈의 자연법 개념에 영향을 미쳤고 문법과 유사 문구 비교에 근거한 주석법이 칼빈의 성경주석 방법에 여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회심의 체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33년경, 즉 칼빈이 24세쯤 되었을 때 그는 갑작스러운 회심의 체험을 했다. 칼빈은 그의 “회심”의 경험을 그의 시편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아버지는 내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후에 아버지는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법률 공부를 하게 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법률 공부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를 비밀리에 수행하시면서 나의 가는 길을 바꾸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런 개종(sudden conversion)을 하게 함으로 내 생각을 완전히 고쳐버리셨다. 그래서 나는 참된 경건에 대한 지식을 맛보게 되었고 내 마음은 곧 참된 경건 가운데서 발전하게 되기를 원하는 강한 소원으로 불붙게 되었다. 그 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내게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참된 교리를 추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계속 내게로 와서 나에게 배운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초신자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나는 세련되지도 못했고 부끄러움도 잘 탔기 때문에 조용히 혼자 지내며 명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대중에게서 떠나서 조용히 있을 곳을 찾곤 했다. 그러나 나의 숨는 곳은 대중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살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Commentaries, Psalms, pp.40-4).

이때 프랑스에서는 개신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다. 1534년 10월 개신교도들이 구교의 미사를 통박하는 내용의 벽보가 빠리 시내 도처에 붙자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가해졌다. 이 박해가 점점 심해져서 칼빈은 할 수 없이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의 바젤에 와서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여기서 신학 연구에 계속 몰두했다.

“「기독교 강요」”(1)

칼빈이 바젤에 머무는 2년 동안 즉 1536년에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써서 출판했다. 칼빈이 27세 되던 해였다. 그런데 그 책은 16세기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 저서가 되었고 칼빈은 쎄네카의 주석에서 이룩하지 못했던 명성을 이 저서로 회복했다. 이 책을 출판함으로 칼빈은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책은 사변적인 신학 서적이라기 보다는 신앙 고백의 책이요, 실제적인 신앙 생활의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제1권의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제2권의 주제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The knowledge of God the Redeemer). 자유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어마하는 신학을 인간으로부터 시작한 반면 칼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시작했다. 이것이 칼빈의 신학의 핵심이고 특징이다.

제1권 제1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을 취급한다. “이 두 가지 지식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을 알 수 없다.” (Without knowledge of self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이사야 선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자기 자신에 관하여 알았듯이, 욥이 하나님을 본 후 구데기와 같은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멀리 보지 않는다면 나는 위선에 싸여 있어 나를 신과 같이 본다. 하나님을 본 에야 추악한 죄에 싸여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엄위 앞에 나타나는 진실된 나 자신을 볼 수 있다. 또한 나의 추함을 알 때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이것은 논리라고 하기 다는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아는 겸손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은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서 “앎”이란 인격적 교제를 말한다.

제1권 제2장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식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가?”를 취급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교적 경건이 없이는 이와 같은 하나님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만약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었다면 자연의 질서 자체가 우리들을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이고 단순한 지식에로 인도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한 상태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나 구원자로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킴으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첫째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 가르침 안에서 주님은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시고 둘째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고후 4:6) 그 자신을 구속주로 나타내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우리의 신지식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만들어야 하며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선한 것을 추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얻은 후에는 모든 것을 그에게 돌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경건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꿈꾸지 않고 유일한 참 하나님을 명상한다. 경건한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를 준수하며 그의 위엄을 높이며 그의 영광을 증진하며 그의 명령을 순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