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풍경화 발전 앞당긴 트리거, 클레즈 피셔
왼쪽 상단에서 비추는 하나님의 햇살, 은총의 빛
피셔의 판화, 종교개혁 미술가들 고민 흔적 담아
예술, 기독교적 삶의 목표 온전히 이룰 주요 매체
인간 타락에도 세상 보살피시는 하나님 나타내
네덜란드 회화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은 클레즈 피셔(Claes Jansz Visscher, 1587-1652)의 하를렘 주위를 묘사한 12점으로 구성된 에칭 풍경화가 발표되면서부터이다.
<즐거운 장소>(Plaisante plaetsen, 1612)는 이 판화집의 표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를렘의 문장(紋章) 좌우편에는 책을 들고 있는 여성과 낫을 들고 있는 남성이 등장한다.
책을 펴고 있는 여성은 하를렘의 경관을 감상하고 있는데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으며, 그녀의 옷에는 ‘근면’(diligentia)이라는 라틴어가 씌여져 있다. 오른쪽의 남성은 한 손으로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쥐고 있다.
이 두 인물은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단순히 하를렘 여행을 권고하면서도 ‘근면’과 ‘정해진 시간’이라는 성경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래 글귀에는 자신을 소개한 후 “나의 작품은 ‘창조의 책’(자연을 가리킴)에서 읽은 것을 묘사한 것”이라며 “여기 묘사된 하를렘 근처의 쾌적한 장소로 여행할 시간이 없는 연인들은 이 판화를 구입하면 집에서도 이러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어찌 보면 전면의 인물과 후경의 하를렘 풍경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인이 함축하는 ‘근면’과 남성의 ‘정해진 시간’이 맡겨진 일에 충실하며 인생을 지혜롭게 보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평화로운 하를렘 풍경은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면 오른쪽 들판을 걷는 사람을 보면 “오, 당신은 이 땅의 방랑자로구나” 하는 시구를 연상시키며, 판 만더의 <인간 삶의 알레고리>에 등장하는 순례자 이미지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 인물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한데,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프리드버그(David Freedberg)는 네덜란드 풍경화의 감상자들이 자연의 묘사를 통해 ‘즐거운 놀이터’로 삼을 수 있게 했다고 풀이하며 이 인물 역시 하를렘 외곽을 소요하는 산책자라고 보았는가 하면, 브루인(J. Bruyn)은 이 그림을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성경적’ 해석의 측면에서 이 인물을 죄악된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알레고리라고 주장하였다.
부르인의 말처럼 이 알레고리는 네덜란드 풍경화에서 종종 멀리 보이는 교회나 성으로 떠나는 방랑자, 또는 예배당을 찾는 사람 등으로 나타난다.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화면의 전체 흐름은 일관적이다.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은 왼쪽 상단에서 비추는 하나님의 햇살, 즉 은총의 빛이다. 이 은총이 두 인물을 비추고 있을 뿐 아니라 하를렘 전역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화면 중앙의 나무는 잎도 없고 열매도 없다. 그것은 어쩌면 죽어가는 나무일 수도 있다. 태양의 빛은 불모의 나무에도 생명을 선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하를렘의 자연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지만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 태양에는 히브리어로 ‘JHWH’(יהוה)가 새겨져 있으며, 미술사학자 부데바인 바커(Boudewijn Bakker)는 이를 하를렘 도시 곳곳에 ‘은총의 빛을 내리시는 창조주’, ‘구원의 태양’으로 해석한 바 있다.
지도 제작자였던 피셔는 하를렘과 그 주위를 세밀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 점은 인근 해변을 묘출한 ‘즐거운 장소’ 시리즈 중 두 번째 판화 <잔트포르트 근처의 등대>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판화는 석조건물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도로 되어 있다. 석조건물 안에 비문 형태로 목차를 각인하고, 그 너머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 창문턱에는 잉크와 책, 펜과 니들, 교회가 새겨진 동판 등이 나열돼 있다.
하를렘 인근 잔트포르트(Zantvoort) 해변을 묘출한 후경의 왼쪽은 등대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낮아지면서, 광활한 하늘과 드넓은 해변이 펼쳐진다. 이 드넓은 해변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풍부한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바커가 표지화에서 말한 것처럼 이 그림 역시 긍정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작품이며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가 만드신 것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롬 1:18-21).
그림은 지상의 아름다움의 목록을 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피조물들은 ‘거룩한 제작자’와 ‘거룩한 보존자’와 관련되어 있고, 그것을 관찰할 수 있도록 영적인 교훈을 함축하고 있다.
피셔의 판화를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관광 홍보물 쯤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종교개혁 이후 미술가들이 안고 있었던 고민의 흔적을 담고 있다.
성상 파괴의 목소리가 고조될 무렵, 경건주의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영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한 바 있다. 교회 부패에 이어 따라온 교회 미술의 타락은 개혁가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따라 시각 예술 종사자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고, 개신교 미술가들은 돌파구를 마련하기에 부심하였다.
칼빈주의자였던 클레즈 피셔는 교회의 형제들에게 회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변론하고자 했다. 피셔에게 예술은 오히려 인생에서 기독교적 삶의 목표를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주효한 매체였다.
그는 예술이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피조 세계 속에서 소정의 목표를 추구해갈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자연 테마가 부흥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함께 새롭게 부상한 중간 계층의 그림 수요도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많은 개신교 화가들은 회화예술의 가능성, 즉 시각예술을 피조된 세계와 믿음을 연결지어 발전시켰다. 그들은 특히 자연 풍경을 역사적 인물의 단순한 배경으로 이해하기보다 거기에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창조질서로 빛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피셔의 경우처럼 인간의 타락이 자행되는 곳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셔는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피셔는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 범람하는 곳에서도 여전히 세상을 보살피시며 유지하신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이처럼 풍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피셔가 믿음의 눈으로 자연세계를 보는 데서 얻어낸 산물일 뿐 아니라 이같은 시각은 훗날 다른 미술가들이 공유하였던 지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즐거운 장소>가 후일 풍경화 장르의 혁신적 발전을 앞당기는 트리거가 된 배경일 것이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