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문화적 열매, 정물화와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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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카렐 판 만더 <인간 삶의 알레고리>

종교개혁 영향 속 태동한 네덜란드 풍경화 대한 오해
충분한 시대적 이해 없이 현재적 시각 재단했기 때문
시각 세계 관조,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중요하게 다뤄
하나님 섭리의 세상과 창조질서 내 인간의 위치 그려

▲인간 삶의 알레고리(카렐 판 만더, 인그레이빙, 39.4 &times; 30.7 cm, 1599,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인간 삶의 알레고리(카렐 판 만더, 인그레이빙, 39.4 × 30.7 cm, 1599,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 1548-1606)는 화가이자 시인, 미술사학자로 네덜란드 공화국 시각예술 발전과 확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화가로 활약하면서 여러 점의 역사적 알레고리 회화를 남긴 업적 외에도 젊은 미술학도를 위해 『화가들에 관한 책』(Schilder-boeck,1604)을 저술하기도 했다.

<인간 삶의 알레고리>(Allegory of the Life of Man)는 J. 마템 (J. Mathem)이 1599년 판화로 재제작한 것으로, 화면은 중앙의 화병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어져 있다. 왼쪽에는 해골이 자리하고 오른쪽에는 어린아이가 자리한다.

판 만더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그들 존재의 일시성(brevity)을 말하고 있다. 즉 화면의 이미지들은 직·간접으로 ‘바니타스(Vanitas)’와 연관되어 있다.

(바니타스란 전도서 1장 1절(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에서 비롯된 용어로,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문화적 저력을 보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주도로 확산되었고, 종국에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란 뜻을 지닌 정물화(Still Life)를 촉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미술사에서 ‘바니타스 정물화’는 한동안 조용하다 현대에 들어와 오드리 플랙에 의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지난 편 참조)

여기서 바니타스는 유리잔, 해골, 연기, 꽃, 기타 물건들의 이미지들을 가리킨다. 그림 좌우편에는 입이 무성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맞은편에는 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대조를 이룬다. 화면 왼쪽에는 빈둥거리는 낚시꾼이 눈에 띄는데, 이는 지팡이를 진 순례자와 대조된다.

순례자는 오직 앞만 보고 정해진 길을 갈 따름이다. 오른쪽 청명한 하늘 밑 산 바로 아래에는 자그마한 폭포가 위치한다. 여기서 폭포는 단순히 자연의 이미지를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유혹’과 ‘격랑’의 삶을 암시하는 요소로 기용된 것이다.

<인간 삶의 알레고리> 속 여러 이미지들은 분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좌측 아이 위 슬레이트에는 “이 세상은 나무와 같다. 이 세상은 자라고 떨어지고 사라지는 잎과 같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우측 해골 위 슬레이트에는 “당신의 집 지붕을 미덕을 위해 고쳐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이는 네덜란드 격언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으라”(히 13:14)는 말씀과 유사하다. 그림의 초점은 곧 시들 꽃을 담은 이미지, 즉 꽃병에 맞추어져 있고 그 안에는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 그림은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하여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깨어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욥 14:1-2)

지혜와 미덕의 권고가 알려주는 것처럼, 이 표현은 네덜란드 문학과 미술에서 자주 언급된 바 있다. 그러한 연상 작용은 풍속화와 정물화뿐 아니라 풍경화에서도 목격된다.

종교개혁 영향 속에서 태동한 네덜란드 풍경화에 대한 오해가 적잖다. 그것은 그 시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현재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입장에 기인한다. 흔히 네덜란드 풍경화를 ‘충실한 자연 복사’로 이해하는 시각도 그런 경향에 속한다.

펠리비앙(Felibien)은 네덜란드 풍경 화가들이 자연이나 일상의 모습 등 저급한 주제들을 복사하는데 급급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나이브한 광경들을 ‘선별력 없이 모방’하는 것으로 지적했으며, 그래서 일상적으로 보이는 자연의 모습은 결점과 함께 그 순수성을 간직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했다.

레이놀즈(Reynolds) 역시 네덜란드 그림이 개별 장소의 재현에 머물며 각각의 이미지 재현은 충실한 편이나 그것은 협의의 풍경 초상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휘튼대학 미술사학자 존 월포드(John Walford)는 화가가 어떤 모티브를 선택하고 회화적 재현을 한다는 것은 실재에 대한 관점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이란 여러 요소들의 복합체, 그러니까 예술가의 개인적인 기질, 지배적인 예술적 가치, 그리고 다른 문화적 가치들을 포함하여 그의 작업맥락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좌우된다. 이것들은 예술가의 자연에 대한 인식과 재현을 형성하는 개념적인 틀(conceptual framework)의 산실 역할을 하는 것이다.

펠리비앙과 레이놀즈는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예술가의 자연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과 17세기 감상자들이 가졌던 문화 태도와 가정들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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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판 만더가 쓴 <화가들에 관한 책>.


네덜란드 사회는 종교개혁 이후 강력한 기독교 정신이 생활 안에 뿌리내렸다. 피조물로서의 자연에 대한 시각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에서도 찾아진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은 매주 저녁 예배에서 행해졌고, 학교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 퍼져갔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에서 하나님은 첫째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고, 둘째로 성령의 말씀으로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시각 세계의 관조는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이 우주는 우리 눈 앞에 있는 가장 훌륭한 책과 같고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많은 피조물들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롬 1:20)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들인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우리로 묵상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냥 내버려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에 맡기시지 않았다. 그 분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셔서, 그 분의 명령 없이는 아무 일도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제13조)

네덜란드 신앙고백은 지속적인 부패를 야기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신·구약 말씀에서 보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서 선하고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영원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는 데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 결과 자연에는 타락의 파편들이 곳곳에 상처를 남기고 삶의 불확실성과 단속성이 들어앉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영향은 곳곳에 스며들었다. 교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인간의 의식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종교개혁 이후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여겼고, 삶의 장소 못지않게 자연 역시 타락과 구속의 진리가 전이된 장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교회의 대대적인 개혁을 가져왔다면, 그것의 문화적 열매로 풍경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참된 실재에 대한 관점이 예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 이로써 예술이 신적 규범의 범위 안에 들어오면서 인생의 진리를 말하게 되었다.

판 만더의 <인간 삶의 알레고리>에서 풍성한 나무 반대편에 상한 나무가 등장하고, 새 생명 반대쪽에 죽음을 암시하는 해골, 연기와 폭포 반대편에 진리를 찾아 나선 순례자가 위치한 것은 그들이 지녔던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라틴어 성경 구절을 배치시켜, 순수한 풍경이 아닌 ‘실재를 보는 관점’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우리 세상과 창조질서 내에서 인간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알레고리 장치를 빌어,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카렐 만더는 예술과 신앙이 별개로 나뉘는 생계형 미술가가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아우르는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전인적 미술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꽃병에 새겨진 “너희는 그날을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마 25:13)는 경고 메시지는, 판 만더가 왜 작품을 했는지 입증해준다.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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