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를 탄생시킨, 전도서 1장 1절 ‘바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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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오드리 플랙의 바니타스 정물화

바니타스, 하나님 없는 인생 얼마나 덧없는가?
17세기 정물화, 오드리 플랙에 의해 다시 주목
전도서의 헛됨 주제로 한, 유대인 작가의 그림

▲마릴린(오드리 플랙, 캔버스에 유채, 1977, 애리조나대학 미술관 소장).
▲마릴린(오드리 플랙, 캔버스에 유채, 1977, 애리조나대학 미술관 소장).

미국 여성화가 오드리 플랙(Audrey Flack, 1931- )의 초기 바니타스 연작은 삶의 덧없음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주목하는 정물화에서 비롯되었다.

바니타스(Vanitas)란 전도서 1장 1절(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에서 비롯된 용어로,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문화적 저력을 보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주도로 확산되었고, 종국에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란 뜻을 지닌 정물화(Still Life)를 촉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미술사에서 ‘바니타스 정물화’는 한동안 조용하다 현대에 들어와 오드리 플랙에 의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한때 뉴욕스쿨 일원으로 있다가 극사실주의로 스타일을 바꾼 오드리 플랙은 <마릴린>(바니타스, 1977)에서 헐리웃의 여배우 마릴린을 등장시킨다. 플랙은 스타 마릴린을 정의하는 향수병, 화장품, 화려한 장신구와 소녀 시절의 앳된 마릴린의 모습을 대조시킴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였다.

또한 플랙은 불타는 촛불, 시간을 앞당기는 모래시계, 포켓워치, 쪼그라드는 오렌지와 함께 마릴린을 제시함으로써 유명인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또한 인간의 욕구를 부추기는 허영심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명품가게 앞에 줄을 서는 광경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명품을 소유하면 우리가 특별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과 부유층에 속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마릴린>, 오늘날 명품관 ‘오픈런’ 떠오르게 해
<제2차 세계대전>, 야망이 빚어낸 비극 보여줘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박탈감이 오히려 명품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낳게 한다는 분석도 있다. 명품에 들떠 있는 모습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ymus Bosch)의 작품 <일곱가지 대죄>(1485-1500) 연작에서 화려한 보닛을 쓴 여인이 악마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허영에 들떠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오드리 플랙의 작품은 우리 삶의 일시성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준다. ‘명품 마켓의 성전’에서 구입한 상품들을 고귀하고 성스럽게 여기나 이것들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도, 죽음을 막지도 못한다.

명품 마켓의 세계는 인간의 충동이 아무 통제도 없이 활개를 치는 비인격적이고 차가운 세계이다. 이것은 잠시 동안 기쁨과 만족감에 빠지게 할 수는 있어도, 곧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들이다. 플랙은 우리를 유혹에 빠뜨릴 수 있는 이미지들을 매력적인 색상과 황홀한 질감에 담아 어필하는 교묘한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혼돈된 사회상을 비판한다.

플랙이 일련의 바니타스를 제작한 데에는 종교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플랙은 동유럽에서 이민 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히브리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와 자신의 전통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작품에서 눈여겨 볼 점은 그의 회화가 황금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바니타스와 깊이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가 아닌, 그만의 방식으로 바니타스를 재구성하였다. 작가에게는 바니타스 회화가 인간의 역사와 현실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하며 모순에 차 있는지 들여다 보는데 요긴한 인식 틀을 제공한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오드리 플랙,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1977, 펜실베니아 미술아카데미 소장).
▲제2차 세계대전(오드리 플랙,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1977, 펜실베니아 미술아카데미 소장).

플랙의 또다른 바니타스 작품인 <제2차 세계대전>은 그녀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야망이 빚어낸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플랙은 이 작품에서 실물 같은 착각을 주기 위해 트롱페이유(trompe l’oeil) 수법을 활용하였으며, 배경에 흑백사진을 배치하여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주고 있다.

화면은 과일, 꽃, 양초, 주얼리, 찻잔, 나비, 사진 등 복잡한 상징적 도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우리 눈에 들어오는 흑백사진은 종군 사진작가 마가렛 버크 화이트(Margaret Burke White)가 연합군을 따라 독일 바이마르 인근의 부헨발트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을 원용한 것이다.

지친 표정의 유대인 수용자들이 철망을 붙들고 있는데 이 수용소는 25만 명이 수용되었고 최소 5만 6천 명이 수용소에서 굶어죽거나 죽을 때까지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을 당해 ‘죽음의 수용소’로 불렸던 곳이다.

철조망 뒤에 서 있는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얼굴은 도대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체념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유일한 구원이 죽음뿐이었던 그들에게 해방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듯하다. 해방의 순간조차도 그들에게는 죽음의 환영(幻影)으로 비추어질 따름이다.

마가렛 화이트는 “내가 본 광경은 너무 믿기지 않아서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플랙은 흑백 사진 앞에 여러 기물들을 배열하였다. 광택이 나는 은쟁반 위에 있는 페스츄리, 고급 찻잔과 촛불 등이 흑백사진과 대조를 이룬다.

기독교 정신 현대미술 접목 가능성 보인 작품들
물질주의·세속주의 허우적대는 현대인에 경종

플랙은 왜 다양한 기물들을 융합했는지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은 전쟁의 우화, 삶의 우화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선과 악의 폭력적인 대조를 이루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인간성의 궁극적인 붕괴-나치-이보다 더 격렬한 대조가 있을 수 있을까?”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충격 못지 않게, 플랙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작가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림 하단에는 하시드 지도자 나흐만(Nahman of Bratslav)의 글귀가 보이는 서적이 펼쳐져 있다. 책 가운데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아무리 큰 산이라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상의 치졸하고 속된 삶으로 인해 우리 시야에서 가려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눈앞의 손을 치우듯 자기 시야에서 그런 삶을 치워버리는 사람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나흐만의 말을 인용해, 플랙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는 악이 만연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싶었으리라.

오드리 플랙이 사용한 바니타스 회화는 오래 전 유행했던 미술 장르이다. 그런 미술을 400여년 만에 되살린 것은 의미가 있으며, 기독교 정신을 현대 미술에도 접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의 작품을 ‘상징주의의 스뫼르고스보르드(Smorgasbord)’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으나, 넓게 보면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예술은 그들에게 현실을 명확히 해준다고 믿는다.”(오드리 플랙)

우리가 속한 세상이 얼마나 ‘진리의 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의 회화를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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