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이 글은 김명혁 목사(본지 편집고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께서 6월 29일 의정부 사랑나눔교회에서 전할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본지는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사 41:8-10)

제가 작년 2013년 5월 12일 주일 여기 의정부 사랑나눔교회에 와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보석으로”라는 제목으로 저 자신에 대한 간증 설교를 했는데, 오늘 여기 다시 와서 “자존감과 자신감”이라는 제목으로 저 자신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고충엽 목사님이 “자존감”에 대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설교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색깔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색깔과 밝은 색깔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고 나는 망할 자라는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니는 것도 신앙이고, 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는 것도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어거스틴과 예일대학교의 펠리칸 박사는 기독교 신앙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공존하는데,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과 하나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내가 범한 죄악을 바라보고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좌절’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닌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신앙을 “비관주의적 낙관주의”라고 정의했습니다. 매우 분명하고 멋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 어거스틴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기독교 신앙의 “자존감과 자신감”에 대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다윗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범한 간음죄와 살인죄를 바라보고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좌절’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 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9, 10). 결국 다윗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슬픔’과 ‘좌절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탄식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달려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입에서는 처절한 죄 고백과 함께 죄 사함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흘러 나오고 또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2-5).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2). 다윗은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결국 “왕자병”에 걸리게까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죄 사함을 받아 새로운 존재가 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두려울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멋지고 대단한 존재로 지어주신 것을 발견하고 대단한 “자존감”을 지니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4). 여기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를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 am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다윗은 자기의 모습을 두려울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멋지고 대단하게 지어졌음을 바라보면서, 자기만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대단한 “자존감”을 지닌 “왕자병”에 걸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또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 18).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생을 세밀하게 간섭하시며 자기에게 베푸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복의 조목들을 세어보려고 했는데, 그 수가 모래알보다 더 많아서 셀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1983년 7월 21일 아이슬란드 리카벡에서 하룻밤을 자고 뉴욕을 거쳐 캐나다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 리카벡의 호텔에서 시 139:17, 18을 읽다가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아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일생을 무척이나 세밀하게 간섭하시며 매우 풍성하게 베푸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복의 조목들을 세어보려고 했는데, 그 수가 모래알보다 더 많아서 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저는 무척 감격하여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도 다윗처럼 “왕자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기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덕분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어디든지 달려가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4-6). 다윗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을 지니고 한평생을 당당하게 뚫고 나아가면서 멋지게 살았습니다. 

둘째로, 사도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왕자병”에 걸려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안드레와 함께 제일 먼저 예수님께로 와서 제자가 되었습니다(요 1:40). 사도 요한은 열 두 사도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주님을 섬기고 증거하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항상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변화산에 올라갈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과 두 제자를 데리고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가장 상세하게 많이 듣고 보고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4, 25). 

사도 요한은 자주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며 안기기도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예수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요13:23-25). 사도 요한은 십자가 아래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있었는데 그 때에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 27). 사실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맡기실 정도로 사도 요한을 매우 믿고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디베랴 바다가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면서도 자기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요 21:7).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요 21:20).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제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왕자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왕자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갇혔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 번 나타나서 마지막 계시의 말씀을 자기에게 맡겨주셨고 천국의 영광스런 모습까지 자기에게 보여주시자, 사도 요한은 매우 크고도 깊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자신을 주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극진하게 받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입을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중얼거리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힌 죄수가 되었지만 죽음도 고난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극도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왕자병”에 걸려서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시를 받아서 쓰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도하고 축원하면서 가장 행복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니 영원한 행복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 22:20,21). 

셋째로,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절한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니면서 동시에 대단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산,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하고 훼방하던 죄인 중의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그리고 자기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악의 세력들을 바라보면서, 평생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하면서 처절한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행 22:4, 5).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 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 25). 사실 저는 오래 전에 강변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처절한 회개의 고백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회개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평생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니고 어둡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의 은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평생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하며 대단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 15).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 21).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우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우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사도 바울은 자기와 같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고 사도가 되었다는 대단한 “자존감”과 함께,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을 지니고 한평생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자신감”을 지니고 모든 환난과 죽음의 세력과 대항해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3-3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사도 바울은 처절한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니고 살면서 동시에 대단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산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다윗과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을 따라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일종의 “왕자병”에 걸려서 한평생을 즐겁게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1살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주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한평생 주님과 교회를 부모님보다 집보다 학교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역사를 누구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매우 많이 받으며 한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순교하신 아버지를 비롯해서 어머니와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과 강원용 목사님 등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저만큼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과 연합 사역 등을 마음껏 하면서 산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나와 같은 죄인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입에서 토해내지 않으시고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복을 베푸시는가를 생각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지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왕자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시 127:2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저는 한평생 어디서나 어느 때나 잠을 잘 잡니다.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도 잠을 잘 잤고, 북한에 가서도 저는 잠을 잘 잤고,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에 가서도 그곳 시간으로 밤에 잠을 잘 잤고, 지금도 저는 원하는 대로 어디서나 어느 때나 잠을 잘 잡니다. 밤에는 8시간 또는 9시간 동안 잠을 잘 잡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는데, 저를 사랑하셔서 잠을 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8년 전인 2006년 11월에 “왕자병”이란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글이 2006년 11월 11일 개혁신보 “목회 칼럼”에 실렸습니다. 『나는 “건망증 병”과 함께 “왕자병”에 걸려 있다. 기독교인들이 쉽게 걸릴 수 있는 병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도 하지 않고 다 잊어버리시니 나도 어느덧 조금 전의 일도 다 잊어버리고 만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심한 “왕자병”에 걸렸었는데 사도 요한을 닮다 보니 나도 어느덧 “왕자병”에 걸리게 되었다. 바로 지난 주 베트남에서 열린 선교사 대회를 다녀와서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왕자병에 걸릴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여러분들이 좀 이해를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 선교사들이 제 방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어떤 선교사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어느 선교사 부부는 수요일 저녁 예배 중이었는데도 저를 잠깐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자녀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아들의 이름을 제 이름을 따서 ‘명혁’이라고 지었다고 하면서, 자기 아들이 목사님처럼 귀한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올까 말까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교사 대회에 왔는데, 저의 소박한 메시지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온 것이 얼마나 잘했는지 모른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이가 듬직한 황모 목사는 미국 시애틀에서 왔는데, 저의 간증적인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거듭해서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식사 때마다 어린 아이들이 내가 앉은 테이블에 와서 조그만 유리 인형들을 받아가며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선교사 사모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참 귀엽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제가 왕자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여러분들이 좀 이해를 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심한 왕자병에 걸렸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내가 하나님께 “어리광”도 부리고 “떼”도 쓰고 좀 “뻔뻔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황송한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뻔뻔한 “왕자병”에 걸리게 된, 불가피한 인간적이고 신적인 이유들이 많다. 한경직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 등이 나를 매우 좋아하셨고 최근에는 강원용 목사님도 나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무척 좋아하시면서 나를 무척 많이 복 주셨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한 가지만 요약해서 싣는다. “1976년 여름, 대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군 옥현리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하던 중이었다. 그 동네의 청년들 20 여명이 교회 근처에 와서 유행가를 부르며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괴롭혔다. 나는 예정에 없던 전도의 대화를 저녁마다 그들과 나누게 되었다. 목요일 밤 동네 청년들을 교회당에 모아 놓고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와 회개하며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다른 청년 하나가 또 앞으로 나오더니 자기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청년 하나는 자기는 청주에서 잘 알려진 불량배인데 자기도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날 밤, 15, 6명의 청년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나는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토요일, 그들과의 이별은 눈물의 이별이었다. 그들과의 서신 왕래는 그 후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편지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나에게는 그 기간이 인생 중에 가장 은혜스러웠고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박사님이 설교와 기도하실 적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박궁래). “떠나는 날 보천서 우리는 너무나 섭섭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던지 나도 모르겠어요.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어요. 선생님, 가을에 꼭 한번 오세요”(박정옥). “죄책감에 눈시울을 적셔야 하는 나의 마음, 주여 이 몸을 용서해 주소서. 나의 발길은 교회로 향한다”(김재옥).』 

이것이 제가 8년 전에 쓴 “왕자병”이란 제목의 글인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변교회의 신자들은 제가 “왕자병”에 걸려 있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변교회에서 소풍을 가는 날이면 날이 아무리 흐려도 “목사님이 가시면 날이 좋아지지요”라는 말은 보통 하는 말이었습니다. 은퇴 후 지난 6년 6개월 동안도 부족한 제가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를 하고 있는데, 부족한 죄인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 받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죄인을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시면서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시는,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해서 저는 “왕자병”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의 요소들을 바라보면서 극도의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니고 울면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고, 성 어거스틴은 “나는 망할 자입니다”라고 거듭해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들과 일꾼들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감사와 찬양을 올리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사랑의 눈물을 흘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사랑의 눈물을 흘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되는 성경 말씀 몇 곳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고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1-3).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고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8, 50). 죄인인 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고 죄를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0-32).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저는 지금도 “건망증병”과 “왕자병”에 걸려 있는데 “건망증병”과 “왕자병”은 괜찮은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왕자병”은 아주 괜찮은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존재를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자존감”을 지니게 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론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을 특별하게 사랑하시며 이 죄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 때문에 그리고 순교자들이 흘린 피 때문에 부족한 죄인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복을 한 없이 베푸신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량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과 일꾼들이 되었다는 “자존감”을 지니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들과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우리는 “자신감”을 지니고 “사망아 네까짓 것이 무엇이냐? 라고 호령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의정부 사랑나눔교회의 고충엽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 날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오호라 나는 저주받을 놈이로다” 라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살아가시고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의 품에 안겨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니고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랑 나눔교회의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 하나님 아버지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녀들로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저처럼 “왕자병”과 “공주병”을 지니고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