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으리라 생각했던 저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대학에 붙어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닐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 했었는데 두 번씩이나 떨어지다니 말할 수 없이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모 집에는 전화마저 없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합격 여부를 알지 못하고 제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의 슬퍼하시는 얼굴이 떠올라 차마 전화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전보를 쳤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과 함께 불합격이라는 말을 쓰기도 싫고 해서 쓴 전보의 내용은 ‘사멸, 죄송합니다’ 였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불합격이라는 말 대신에 죽어 없어지고 싶다는 뜻으로 사멸이라는 말을 쓴 것 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했는데…’, ‘학원에서도 충분히 합격할만하다 해서 응시했는데…‘ 등의 한탄과 함께 내겐 왜 되는 일이 없는가 하는 절망, 좌절감이 휘몰아쳤습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시와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뵙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었습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착역까지 가서 포장마차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털어, 먹어본 적도 없었던 소주잔을 들이켰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 야간열차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이모집과 독서실을 뒤져도 제가 없으니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셔서 애타게 저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독서실 근처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죄책감과 죄송함 때문에 큰절을 하고 머리를 드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영화를 보러가자”고 하셨습니다. 제 마음을 안 다치게 하시려고, 영화를 너무 좋아했던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부자가 함께 재미있는 영화를 본 후 저녁식사를 하면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냐?” 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여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후기대학 중에서 제일 낫다는 성균관대에 응시하겠습니다. 첫 납부금만 내주시면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 다니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계획을 승인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하숙을 하거나 방을 얻어 자취를 할 형편이 못돼 성대 정문 오른쪽 큰 길 옆에 있는 독서실에 짐을 풀었습니다. 짐이라야 가방 두어 개 뿐이었습니다. 침대는 물론 없고 칸막이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저의 거처였습니다. 밤에는 의자 몇 개를 줄줄이 붙여 침대를 삼아 잠을 청했습니다.

끼니는 돼지식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한달치 90그릇 밥값 7,900원을 내고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2차 대학에 다닌다는 패배주의와 무엇을 하려해도 운명적으로 잘 안된다는 운명주의였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시련보다 마음의 불편함이 더 큰 고통이란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패배주의 때문인지 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이 생각됐으며 패배주의, 운명주의에 더욱 빠져들었습니다. 사(死)의 찬가를 되뇌이고 김지하의 ‘5적시(五賊詩)’를 읊조렸습니다.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서울대에 들어간 친구들을 만나면 기분도 나쁘고 주눅도 들어 돌아와서는 소주만 마셨습니다. 미팅을 해도 마음에 안드는 못난 파트너와 맺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감싸고 있던 패배주의는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송하성 박사는

고등학교 시절 예수를 영접하고 ‘인생역전’의 신화를 이룬 인물. 성균관대 경제학과, 서울대학원 행정학 석사, 파리 소르본느대학원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미대사관 시절 조지타운대에서 국제변호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22회 행정고시에 합격, 경제기획원 공보담당관, OECD 68차 경쟁법 정책위원회 한국대표, 주미대사관 경제외교관,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을 거쳐 현재 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경기대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다. 3선의 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