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요 5:39)와 그의 강림이다. 성경은 300회 이상 그의 강림을 약속하고 있다. 성도의 신앙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와 그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구약 성도의 차이가 없다.

아벨, 에녹, 아브라함, 다윗 같은 구약 성도들의 염원 역시 그리스도의 강림이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강림을 열망했던 구약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칠 주제도 언제나 그리스도였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목적도 그들로 하여금 ‘그것의 성취자’로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짐승 제사’를 드리게 한 목적도 그것의 ‘실체’이며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믿음의 선진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환영했던(히 11:13)” 것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그의 강림이었다. 그 기다림의 끝은 이러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갈 4:4).”

신약시대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이 신앙의 대주제였다. 사도들이 수없이 그의 재림을 언약했다(살전 4:16, 히 10:37, 계 1:7). 지상과의 하직인 그리스도 승천 때는 천사의 입을 빌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 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직접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요14:3)”고 했다.

◈재림 신앙인들의 시간 카이로스(καιρός)

그런데 재림 약속이 있은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주의 재림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해 ‘재림 신앙’을 포기했고(벧후 3:3-5), 어떤 이들은 21세기인 지금도 흔들림 없이 재림 신앙을 견지한다(계 22:20).

둘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것은 그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수평적인(horizontal) ‘크로노스(Χρόνος)’ 개념을 가졌느냐, 하나님으로부터의 수직적인(vertical) ‘카이로스(καιρός)’ 개념을 가졌느냐에서 갈려진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 짓는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 개념으로는 2천년이라는 시간을 극복할 수 없다. 크로노스의 2천년은 너무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2천년이 지났는데 아직도?’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40년 후, 곧 주후 70년 쯤부터 여기저기서 기다림에 대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며, ’시한부(時限附) 종말론‘, ’상징적 재림론‘ 혹은 ’재림 부정론‘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모두 지리한 ’크로노스‘ 개념에 매몰된 결과이다.

반면 수직적인 ’카이로스(καιρός)‘ 개념은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소위 마이스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하나님의 시간‘으로써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를 공유함으로서이다.

이러한 수직적 ‘카이로스(καιρός)’에는 당연히 ‘더디다 빠르다’는 개념도, ‘조급하다 느긋하다’는 개념도 없다. 따라서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 5:8-9)”는 2천 년 전의 말씀을 21세기인 지금 받아들이는데도 어려움이 없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 3:8)”고 한 말씀 역시 그가 카이로스의 ‘수직적(vertical) 시간’ 개념을 공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카이로스(καιρός)’를 공유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다렸던 아브라함도, 지금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유한된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 시간을 아는가?

‘영생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유한된 시공간 안에 영원(eternity)이 들어오신 것’이고, 이는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를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개인이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날 때 구현된다. 이는 단지 영생을 약속받는 것(요 3:36; 5:24; 6;47, 54)을 넘어 그것의 체험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물론 죄인의 카이로스 경험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을 수 없는, 단지 희미한 형상적 경험(imagic experience)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부정될 수 없는 확실성을 담보한다.

다음 구절은 ‘영생’을 샘물에 비유하는 말씀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everlasting life)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칭의의 원리’와 함께 ‘영생의 경험적인 측면’을 함의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러한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 체험은 성도들로 하여금 유한된 시간 개념을 극복하고, 2천년이라는 시간차를 능히 뛰어넘어 재림 신앙을 견지하도록 해 준다.

그렇다고 성도가 항상 ‘카이로스’를 견지해 재림 신앙을 굳건히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약 5:8)”,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 3:9)”는 권면이 필요할 만큼,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혹 때론 대적자들이 노골적으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3)”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며 미혹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일시적으로 재림 신앙이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내외적인 도전들이 있음에도,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각성시킴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며 재림 신앙을 붙들도록 해 준다.

◈재림 신앙은 사랑의 기다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생면부지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와 연합하여(엡 5:23-25) 부부애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소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시는(계 1:4)”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적 체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이미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의 오심을 예언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재림 신앙은 ‘미증유(未曾有)의 존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의 발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만났기에 하나님을 찾고, 성령을 받았기에 성령을 갈망하고, 의에 배불렀기에 의에 주려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내주해 있지 않은 자들은 그가 누군지도, 그의 사랑도 모른다. 따라서 당연히 그의 오심에도 관심이 없다. 이 점에서, 우리의 재림 신앙은 은혜에 은혜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려 함이다.

영으로만 하던 사랑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고전 13:12, 요일 3:2) 하려 함이요, 기왕의 사랑을 더욱 절정화(絶頂化)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은 ‘연모(戀慕)의 기다림’이다.

성경이 그의 재림일(再臨日)을 ‘간절히 사모할 날(벧후 3:12)’이요, ‘복스러운 소망의 날(딛 2:13)’이라 함도, 그날은 오매불망 사랑하는 이를 대면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누가 그들에게 ‘그가 오신다’고 귀띔해 주지 않아도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미 그들 안에 내주해 계신, 익히 아는 분이 오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가 늦게 오시더라도 안달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그들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