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 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대하 15:12, 16)”.

요즘 정부와 정치권 일부 인사들이나 일부 국민들에게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가 ‘검찰개혁’입니다. 말문이 막히고 핑계댈 것이 없을 때,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법무부 장관이나 친정부 국회의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때로는 범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감추거나 형량을 낮추기 위한 의도로 사용(使用)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달 10월, ‘개혁’이라는 용어가 오용(誤用)되고 있으며, 남용(濫用)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이란 무슨 뜻일까요? 개혁(改革)이라 함은 어학사전에서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낡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바꾸는 일”이라고 합니다.

개혁은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사회 특정한 면의 점층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이자 사회운동의 하나입니다. 개혁운동은 혁명과 같은 더 급진적인 사회운동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필자가 직장을 다닐 시절에는 ‘무재해’ 운동, ‘위험 예지’ 운동, 그리고 ‘제로 디펙트’ 운동 등을 했습니다. 각종 사고로부터 직장동료들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들을 창출하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큰 효과를 얻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개혁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국가기관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관행이나 법을 과감하게 수정 또는 바꾸는 일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는 분들은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것들을 감추기 위해 ‘개혁’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검찰개혁’을 마치 무슨 철지한 유행가처럼 부르짖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혁은 본인 스스로 담당하는 일을 오래도록 경험하며 숙련된 최고의 자세로, 공동체나 나라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주위의 험한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추진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지도자들의 개혁을 부르짖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개혁이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아사 왕의 개혁 운동이 있기까지, 왕가의 혼란과 통치권이 위축, 또는 신변의 위협, 현실적인 이권 포기 등 수많은 난제들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 왕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과감히 숙청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약속대로 무려 20년간 평화를 주셨습니다.

특히 아사 왕의 개혁 운동 핵심은 우상 숭배 전파자였던 태후 마아가를 폐위시킨 일이었습니다. 아사 왕의 과감한 개혁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평화를 허락하심으로써 언약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마르틴 루터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15-16세기 독일 성직자이며 성서학자, 언어학자였습니다. 당시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루터파 교회를 세워 새로운 교회 형성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1505년 죽음의 문제에 대한 체험을 계기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신부의 길을 시작으로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 논제를 게시해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폐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종교개혁 운동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저술에서 비롯된 종교개혁 운동은 개신교를 낳았으며, 사회경제 정치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1546년 그는 과로로 숨져 비텐베르크 교회에 안장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한국 전통 초상화 기법으로 그린 마르틴 루터. ⓒ조용진 얼굴연구소 제공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 보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던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다른 신을 섬기므로 불행을 자초하는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 신앙인들 역시 만군의 여호와 외에 다른 어떤 것들을 섬기거나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을 탐한다든지, 돈을 탐하든지, 이성을 탐하든지, 그리고 이웃을 탐하든지 하는 것들을 오로지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곧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에 있음을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인류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영원한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참 생명인 것입니다.

인간이 약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낮아지면 하나님도 그 긍휼과 자비를 풍성히 베푸시지만, 인간이 스스로 교만해지면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징계하시는 분임을 확실하게 믿어야겠습니다.

2020년 오늘날,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말씀하셨듯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신 그 약속들이 정확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씁쓸함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특히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전에 없었던 비대면 예배, 대면 예배라는 단어가 새로이 탄생되어, 신앙인들에게 적잖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마다 초대교회를 논하면서, 순교로 우리 기독교를 지켜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늘 입에 오르내리면서, 정작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일어나야 할 시기에는 오히려 숨어 버리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민낯을 쳐다보려니, 이제는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설교 때마다 찬송을 부르고 “주여~” 하고 외치면서,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드리라는 정부의 방침에는 어찌 그리 말씀이 없습니까? 이제는 교회 예배도 정부가 허가하면 그제서야 드릴 것인가요? 참으로 어이가 없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싶어,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흘리시면서까지 제자들과 온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그 깊은 마음을 하나도 모른 채 졸음에 취해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현실은 아닐까요?

복음을 증거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이 시대에, 우리 신앙인들은 말로만 제2의 종교개혁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땀방울이 핏빛으로 변할 때까지 우리의 기도와 행동을 먼저 개혁하여,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그 정신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각 교회들은 철저히 작은 교회와 큰 교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큰 교회 일부 목사님들은 VIP로 둔갑해 바깥 행사장이나 나라의 위정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작은 교회는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힘을 모으고 땀을 흘려야 함에도, 겉으로 보이는 큰 교회들의 모습을 보고 부러워할 뿐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주님 말씀은 언제 또 까먹으셨는지, 큰 교회에 대한 부담감과 열등의식으로 자포자기하는 모습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저러는가 싶기도 합니다.

개혁은 검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신부터 개혁을 단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나라를 위해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등 깊이 있는 논의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에게 종교개혁의 핵심은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혁은 세미나나 어떤 컨퍼런스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으로 회복하는 것이 개혁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사 왕의 개혁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모범답안으로 삼고, 날마다 개혁과 갱신을 실천하는 믿음의 군병들이 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