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아내가 없는 어느 월요일, 싱크대에 그릇 몇 개가 있어 착한 일 좀 하려고 설거지를 했다. 접시를 닦는 순간, 접시가 손에서 벗어났다.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위험한 순간이다. 자칫 잘못하면 접시가 깨지게 생겼다. 반사적으로 내 발이 나갔다. 접시가 부딪히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접시가 발을 벗어나고 말았다. 결국 접시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 접시는 아내가 아끼는 것인데. 다행히 아내는 ‘그걸 갖고 뭘 그래?’라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넘기고 말았다. 접시가 깨지는 것도 나에게 크나큰 조바심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자아야말로 깨지는 게 너무 힘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존심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다.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을 인생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자아가 깨어지는 걸 두려워한다. 부서지는 고통을 힘들어한다.

그러나 정말 걱정해야 할 건 따로 있다. 부서질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 깨지지 않는 두꺼운 껍질. 뼛속 깊숙한 데까지 깊이 뿌리박고 있는 자기 사랑. 여간해선 포기하기 싫은 알량한 자존심.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자기 의에 대한 깊은 신뢰. 이런 것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데 우리가 알거니와, 자기 깨어짐과 부서짐 없이는 결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자신을 담글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를 지기 전에, 무작정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전에,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자아를 깨뜨리라는 것이다.

한때 입에 달고 다녔던 찬양이 하나 있다.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더 많이 깨져야 하리. 씻겨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다 버리고 다 고치고 겸손히 낮아져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 못할 거예요….”

정말이지 더 많이 깨어지고 부서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사역의 현장 속에서, 내가 얼마나 깨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진 존재인가? 깨어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데, 깨어져서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게 두렵다. 수치스러운 자신의 저 밑바닥 모습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게 겁난다. 부서짐의 아픔과 고통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깨어짐처럼 소중한 은혜는 없다. 깨어지지 않은 마음에는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비가 올 때, 단단한 땅은 물을 흡수할 수 없다. 부드럽게 부서진 땅이어야 물을 잘 흡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에 잘 흡수된다.

깨어짐은 새로운 출생을 가능케 한다. 깨어짐은 한없는 천상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요, 부요한 생명과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기에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는 깨어짐과 부서짐의 신비를 알아야 한다. 깨어짐이란 결코 죽음이 아닌 소생이다. 파괴가 아닌 건설이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깨어지고 부서짐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초대한다. 더 깊은 영성의 세계로 안내한다. 십자가에서 부서지고 깨어진 예수님의 마음을 맛보게 한다. 이 비밀을 아는 자에게는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비전의 세계가 그려진다.

깨어짐의 삶을 위해 몇 가지 점검할 게 있다. 첫째,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강해도 좋다. 주변 환경과 직면해서는 당당한 게 좋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교만을 버려야 한다. 창조자 앞에서 고개를 쳐들지 말아야 한다. 곡식도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않는가?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인간이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할까?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항복해야 한다.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우면서 창조자 하나님을 등지는 삶은 어리석은 일이다. 창조자 하나님께 두 손 들어 항복하고, 그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인생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해야 한다. 축구를 할 때 축구를 잘하는 선수 편이 되는 건 굉장히 신나는 일이다. 그 선수 덕에 경기를 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나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모든 복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지혜와 능력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이 살기 때문에(갈 2:20).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세력보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요일 4:4).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하늘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갈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셋째, 성령의 능력으로 거친 세상을 대적해야 한다. 사울은 한때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여 예언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호와의 영은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에 사로잡혔다.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울 왕은 번뇌로 가득 찼다. 그의 인생을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 말을 듣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성령의 소원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보다 성령이 주도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게 훨씬 더 편함을 알아야 한다.

넷째,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신뢰해야 한다. 언약 백성들은 변하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산다. 그러나 불변하는 말씀을 갖고 산다. 불변하는 말씀을 갖고 변하는 세상에 도전장을 던져야 한다. 때때로 무모할 수 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능력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성실히 이루어 가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져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대로 움직이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깨뜨리면 깨어져야 한다.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회개해야 한다. 말씀을 의지해서 돌아서야 한다. 그러고 나면 살 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