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한 사람의 적이 열 명의 친구가 주는 행복감을 빼앗아갈 수 있다. 수많은 아군이 있을지라도, 한 사람의 적이 가져다 주는 심리적 부담과 압박은 대단하다. 더구나 공동체나 조직 속에서 대적하는 한 사람의 영향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스샤오옌은 <내 편이 아니라도 적을 만들지 마라>는 책을 썼다. 그는 말한다. ‘조직이 무너지는 것은 3%의 반대자 때문이며, 10명의 친구가 단 한 명의 적을 당하지 못한다.’

괴롭히려고 하는 한 명으로 인해 쏟게 되는 에너지는 엄청난 양이다.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아 부으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엉뚱한 곳으로 낭비되고 만다.

살아가면서 적을 만들지 않을 재간은 없다. 그럼에도 적을 줄여나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적이지만, 그 적을 친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강한 사람이란 자기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과 적을 벗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기술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 사랑으로 녹이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가진 허물을 탓하고 힘들어한다. 그런데 허물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허물을 덮어 줄 사랑이 없는 게 문제다. 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허물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지구를 떠나야 한다. 허물을 탓하기보다 자신에게 허물을 덮어줄 사랑이 없는 걸 탄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끝까지 하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게 필요하다. 사실 말이 그렇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걸 목표로 잡고 끊임없이 도전해 가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으니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적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부어질 때까지.

둘째,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라.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벧전 2:23). 그리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20세기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한다. “하나님께 복수를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복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복수를 위탁하십시오. 주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복수와 보복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여러분의 에돔을 하나님이 보복해 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복수하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복수하도록 맡겨 두어야 한다. 사실 나에게는 복수할 권한이 없다. 복수는 하나님의 몫이다. 내가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교만한 일이다. 내가 복수하려니, 보복의 되풀이만 일어날 뿐이다. 사실 복수하려는 당사자가 가장 힘든데도, 복수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하나님께 망각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안 좋은 일이나 감정은 잊어버려야 한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의 사람은 새 일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 남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엄격하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의외로 너그럽고 관대하다. 남들에게는 엄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작은 실수와 잘못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고 살아야 한다. ‘이까짓 것’이라고 생각되는 죄와 악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너무 너그러운 사람은 성장도 발전도 없다. 그러나 남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지나친 기대가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이해하고 관용해야 한다. 다 따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상대방의 결점과 허물이 있을지라도 눈감아주는 용기도 필요하다.

넷째,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관계를 훼손하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갖고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큰 것을 얻기 위해 사소한 것은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문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쓸데없는 논쟁과 싸움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바나바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해, 마가 요한의 허물을 덮어 주었다. 결국 마가 요한을 얻는 큰 성과를 가져왔다.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이리저리 추격하는 사울이 얼마나 밉겠는가? 그런데 끝까지 대적하지 않았다.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남을 바로잡기 전에 자신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인간의 눈에는 본래 남의 단점과 허물은 잘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결점과 잘못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기를 잘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고 말씀하신다. 공동체와 개인의 발전을 위해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비판이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선한 동기와 바른 태도로 비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을 만들 수 있다.

여섯째,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를 주셨다. 왜? 야고보 사도의 충고처럼, 말하기는 더디, 듣기는 속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약 1:19).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단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똑똑하고 전문가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는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적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줌으로, 그의 마음과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