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있다. 아직까지 인생을 잘 알지 못하기에 저지른 일이지만,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선배들이 강압으로 왼팔에 문신을 새겼다. 한쪽 팔만 새기고 보니 밸런스가 잘 안 맞았다. 보기에 좋지 않아 오른팔에 추가로 문신을 새겼다. 그때만 해도 영웅심리가 작용했으리라. 이렇게 하면 친구들이 대단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에게 우쭐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부지 때 저지른, 후회스러운 인생 흔적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문신을 새긴 게 후회스러웠다. 갑자기 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그런데 번번이 퇴짜를 당하곤 했다. 몸에 새긴 문신 때문에. 가까스로 아르바이트를 구해도 여름이면 팔토시를 해야 했다. 양팔에 있는 문신이 드러나게 되니까. 남들이 보기에 흉측하니까. 직장에서 그만둬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정말이지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너무나 후회스럽기만 하다.

고민 끝에 생각해냈다. 문신을 없애자. 성형수술을 받기로 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 어머니가 준 돈까지 합하니 1,200만 원 상당이 되었다. 희망을 갖고 성형외과를 찾았다. 그런데 희망은 사라졌다. 병원으로 부풀었던 발걸음을 힘없이 돌이켜야만 했다. 시술비가 3,000만 원 정도 든다는 게다. 순간, 부풀었던 가슴이 싸늘히 식었다.

낙담 속에 담겨 있던 차에 희망의 소식이 들렸다. 문신을 지워주는 ‘사랑의 지우개’ 프로그램이 있다는 게다. 철부지 영웅심리에 새겼지만, 인생의 주홍글씨가 된 문신. 저주스럽게 증오하지만 떼 낼 수 없는 원수. 돈이 없어 평생 문신을 갖고 살아야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원수 같은 문신을 지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새로운 인생이 출발되는 순간이다.

아름다운 사회, 행복한 공동체를 꿈꿔 본다. 만약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흔적을 지워줄 수 있는 사랑의 지우개를 갖고 있다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닐까? 예수님은 그랬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흔적, 육체에 있는 흔적들을 지워 주셨다.

‘죄인’이라는 딱지를 갖고 살아가던 삭개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그 흔적을 지워 버렸다. 떳떳하지 못한 삶의 흔적 때문에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흔적을 지워 버렸다.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어, 귀로 들을 수 없어, 지혈이 되지 않아 고통당하던 이들의 몸에 있는 흔적을 깔끔히 지워 주셨다. 사랑의 지우개로.

잊히지 않는 아픈 기억들을 사랑의 지우개로 지워 버려야 한다. 상처를 지우지 못해 스스로 고통을 당한다. 그 상처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들이 하는 보복 전쟁으로 공동체가 아파한다. 보복의 파편이 공동체 이곳저곳을 공략한다. 사랑의 지우개로 깔끔하게 지워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육체에 흔적을 갖기를 원했다. 할례를.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졌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이제는 구원받았다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할례를 의인의 표쯤으로 간주했다. 믿음의 삶은 엮어내지 못하면서도. 그래서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바울과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바울은 괴로웠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진짜 자랑스러운 건 우리 죄를 대신해 짊어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다. 십자가에서 찔린 창 자국, 십자가에서 못 박혀 손에 새겨진 흔적. 아니 사람들에게 당한 마음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 모욕감으로. 비웃음으로. 침 뱉음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

몸에 흔적을 내려거든,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면 어떨까? 그 흔적은 자랑스럽다. 감동을 만들어 준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게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예수님을 사랑해서 남은 상처. 예수님을 위해 살다보니 남겨진 흔적. 내 안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 스티그마! 지금 내가 외칠 수 있는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미얀마 선교행전’을 썼던 아도니람 저드슨.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얀마로 떠났다. 미얀마는 기독교 전도가 금지되어 있는 불교국가다. 그곳에서 선교하다가 체포되었다. 17개월 동안 교도소 신세를 졌다. 그냥 감방에 가둔 것이 아니다. 발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그래서 발목에 깊은 자국이 났다. 저드슨 선교사가 출옥한 후, 많은 미얀마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도대체 왜? 그건 그의 설교 때문이 아니다. 그의 발목에 있는 쇠고랑 자국 때문이다. ‘백인이 이런 고생을 하면서 전할 때에는 반드시 이 종교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말보다 더 강한 메시지, 그게 바로 스티그마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떤가? 말은 많다. 믿음을 말하기는 잘한다.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 ‘예수 믿고 천국 가라’고 외치고 있다. 좋은 일이다. 자랑할 일이다. 그런데 아는가? 예수를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복음을 운운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 예수님의 흔적, 스티그마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떤가? 서로 고함 지르는 소리에 마음에 흔적이 남고 있다. 서로 치고 받아서 몸에 상처를 내고 있다. 정작 필요한 예수님의 흔적인 스티그마는 사라지고 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싸우는 소리만 들린다. 찌푸리는 인상만 보인다. 사람들을 움직이고 감동시킬 만한 예수님의 흔적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교회의 희망은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각자의 몸에 스티그마를 회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