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의 저서들로 가득한 정인영 선생님의 서재.

본지는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소천 50주기를 맞아, 루이스와 그의 작품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는 연중기획을 진행 중입니다. 자칭 ‘C. S. 루이스 팬클럽 회장’이자, 어린이 독자들에게 1944-1963년 사이 루이스가 보낸 97통의 편지를 모아 엮은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홍성사)>의 번역가인 정인영 선생님(양주 효촌초)이 최근 한국라브리에서 C. S. 루이스와 <나니아 연대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를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정 선생님은 지난 5월 ‘나니아 연대기를 알려드립니다’를 기고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편집자 주

2. 의식

두번째로 ‘의식’입니다. 의식 역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의식이란 나보다 크고, 위대하며, 오래된 것과 접속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성경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피 흘리는 제사,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 정체성을 새기는 할례. 이 뿐 아닙니다. 신약에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만찬과 세례 의식도 남겨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의식다운 의식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성인식도 하지 않고 책례도 하지 않습니다. 졸업식과 입학식은 형식적인 것이 많습니다. 결혼식장은 ‘신혼부부 생산공장’ 같습니다. 마을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도 용돈 많이 받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각종 국경일도 TV에서 하는 기념식을 보지 않는다면 어떤 날인지도 모릅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고, 복장을 갖추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며,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일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나니아의 창조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네 아이는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됩니다. 1주일씩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고, 모든 임무를 완수한 아이들이 아슬란과 나누는 대화도 의식처럼 치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책 한 권이 끝나면 독서보고서를 쓰게 합니다. 물론 쓴다고 다 통과되는 것은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통과되면 아슬란 도장을 찍어줍니다. 이 도장은 아무 때나 찍어주지 않고 공을 들여 완수한 것에만 찍어줍니다. 의식은 아무나 참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아이들은 학급 화폐로 직접 배지를 삽니다. 그냥 줄 줄 알았는데 사라고 하니 ‘안 사요!’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나중에 아슬란 배지를 사려면 7권에 해당하는 배지가 다 있어야 하거든요. 한 권을 다 읽고 독서보고서까지 통과해야 배지를 살 수 있고, 이 배지가 있어야 의식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정 선생님이 갖고 계신 ‘아슬란 인장’.

혹 배지를 집에 두고 온 아이는 학급화폐를 내고 대여해야 합니다. 의식은 엄숙하게 치릅니다. 전등을 끄고 커튼을 칩니다. 탁자를 마련하고 식탁보를 깝니다. 초를 켜고 와인잔에 포도주스를 따르고 나니아 옷장문을 통해 입장합니다. 명구를 외우고 잔을 부딪히고 소감문을 발표합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같은 인사말을 주고 받습니다.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눕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의식의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제 기억력으로 보자면 거의 확실합니다!). 다만 의식의 분위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공을 들여야 하고, 참여하기 위해선 준비를 해야 하고, 말을 아끼고 상대방에 집중해야 하며, 어른으로 대우받았던 흐뭇한 이미지 하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중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이미지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세번째,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대로 과학은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숭배할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자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볼 기회도 빼앗겼습니다. 자연을 보며 감탄하지 않습니다. 섭리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지금도 자연에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니아는 동물이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신기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가 건국될 때는 땅에 동전을 심으면 동전나무가 자라고 사탕을 심으면 사탕나무가 자랐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지만 씨앗을 땅에 심으면 토마토도 되고 사과도 되고 봉숭아도 된다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작고 검은 것을 심으면 크고 화려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신기해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얘들아, 나니아는 노래로 창조했대. 그럼 우리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좀 똘똘한 아이들은 빅뱅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빅뱅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데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빛의 속도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이야.”

이렇게 얘기를 해 주어도 아이들은 우리 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몇 번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똘똘한 아이들은 그제서야 우리 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말을 합니다.

성경의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받아들이게 하려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기적이 많이 나오냐.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 세계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제대로 보기만 하면 우리 삶에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나니아와 우리 세계를 비교하다 보면, 우리 세계가 얼마나 신기한지 알 수 있습니다.

4. 천국에 대한 그리움

네번째, 천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 아이들이 항상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똘똘한 아이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찹니다.
“야, 그걸 믿냐? 그건 책에서나 나오는 거지.”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책에 나오는 것은 다 실제로 없는 거네?”
“그건 아닌데요. 이건 소설책이잖아요. 다 상상해서 쓴 거라고요.”
“그렇구나. 그럼 두 가지만 질문하자. 첫째, 소설 속에 나온 이야기는 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겠네? 둘째, ‘나니아’라는 나라는 없어도 나니아 같은 나라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진지한 토론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실력이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공정하게 토론이 진행되면 대개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하냐고 물었던 친구에게 혀를 찼던 그 아이가 다음 번에도 코웃음을 치긴 힘듭니다.

▲‘아슬란의 나라’로 통하는 ‘옷장’. ⓒ영화사 제공

게다가 ‘나니아는 소설 속의 나라일 뿐’이라고 하는 친구도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가고 싶은 사람?’ 하고 물으면 손을 번쩍 듭니다. 돌탁자에 앉아 고대 글씨를 만져보고 베루아 평원을 달리며 비버의 집에 초대받고 배불뚝이 곰 삼형제의 동굴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캐어패러벨 성의 네 왕좌에 앉고, 무도회에 참석하며 새벽출정호를 타고 동쪽 바다로 나가고 싶어합니다. 무엇보다 마녀의 터키젤리를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해 줍니다.

“얘들아, 옛날의 그 마법의 터키젤리는 너무 위험해서 구할 수 없어. 대신 지금 나니아의 비버 기념품점에 가면 독성은 없지만 맛은 똑같은 터키젤리를 살 수 있단다. 다음에 내가 나니아에 가면 한번 구해볼게.”
아슬란이 직접 말했습니다.
“내 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느 세계에나 있느니라.”
또 나니아의 탄생을 지켜 보았던 디고리커크 교수님은 피터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피터가 말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선 정말로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여기저기 어디에나, 바로 코앞에도요?”
“암, 있을 수 있고말고.”
교수는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요즘 학교에서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군.”-공립학교 교사로서 작가에게 강하게 불만을 갖고 있는 대목입니다.

어디에서나 나니아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꿈을 꾸죠.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나니아가 존재하고 또 나니아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월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제게 질문을 던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선생님 정말로 나니아에 가 보셨어요?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그러면 전 놀라지도, 귀찮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합니다.
“응.”
그럼 또 묻습니다.
“에이, 거짓말. 그럼 다시 가 봐요. 어디서나 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우리 반 옷장을 통해 가 봐요.”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 출연해 화제가 된 틸다 스윈튼은 영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서 ‘하얀 마녀’를 맡았다. ⓒ영화사 홈페이지

그럼 전 역시 동일한 말투로 답합니다.
“근데 나니아는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아슬란이 불러야 갈 수 있어. 또 아슬란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단다. 디고리의 말 기억 안나? 정말이지 나니아에 가려고 절대 애쓰지 말라는 말. 언젠가 너희들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가게 될 거라는 말. 나도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구나.”

방금의 몇 문장을 읽으면서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흥분이나 처음 듣지만 나를 사로잡은 음악, 구절 하나하나가 내 몸에 와서 달라붙는 시, 온 몸을 개운하게 하는 향기를 떠올리신 분이 있다면, 역시 나니아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우린 천국 아닌 것을 사모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는 아이들 역시 나니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다섯 번을 더 읽으면 어떤 소감이 추가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가의 눈을 가지신 분이 있다면, 그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님을 아시겠죠. 오히려 같은 소설을 한국어와 영어로 읽듯이 전혀 다른 글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전혀 다른 표지판이 같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아시겠죠. 그리고 그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될 것입니다. <끝>

/정인영 교사(양주 효촌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