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소천 50주기를 맞아, 루이스와 그의 작품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는 연중기획을 진행 중입니다. 지난 5월 ‘나니아 연대기를 알려드립니다’를 기고해 주신 정인영 선생님(양주 효촌초)이 최근 한국라브리에서 C. S. 루이스와 <나니아 연대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보내 주셨습니다.

정 선생님은 현재까지 번역된 루이스의 책을 모두 소장한 자칭 ‘C. S. 루이스 팬클럽 회장’이자, 어린이 독자들에게 1944-1963년 사이 루이스가 보낸 97통의 편지를 모아 엮은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홍성사)>의 번역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나니아 연대기’의 팬이던 아이들이 루이스에게 책과 작가, 글쓰기 요령, 학교생활과 신앙 고민 등을 주제로 궁금한 점을 물은 것에 대한 그의 답장입니다. -편집자 주

저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고 있습니다. 첫 해엔 한두 권만 읽어 주었는데 나중엔 아예 1년 동안 7권을 다 읽어 주었습니다. 초기엔 미리 읽어 보지 못하고 읽어 준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아이들은 더 재미있어 하더군요. 선생님이 책을 읽다 말고 “얘들아,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냐? 진짜 재밌다”고 하면서 킥킥대고 있으니 아이들은 웃겼겠죠.

이렇게 하다 보니 벌써 5년 넘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었습니다. 요즘엔 아이들과 함께 읽거든요(아슬란을 제외한 모든 역할은 나누어 읽습니다. 아슬란은 권위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항상 제가 읽고, 어쩌다 한 번씩 읽을 기회를 줍니다). 저처럼 나니아 연대기를 5번 이상 소리내어 읽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5년 이상 아이들과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며 느낀 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권위

▲<나니아 연대기>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 ⓒ영화사 홈페이지

먼저 ‘권위’입니다. 요즘이야말로 아이들이 권위를 느끼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조선 시대처럼 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제 시대처럼 모두의 존경을 받는 독립투사가 있거나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내 삶에 권위로 다가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화 투쟁도 지나갔고 통일은 피부로 와닿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몽둥이를 들어서라도 인간을 만들자’는 부모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훈계가 아이들의 사고를 제한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부모가 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권위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부재와 연결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보다 크고 대단하고 무서우며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늘과 같은 왕도 없고, 햇빛과 같은 아버지도 없고, 별과 같이 모두가 우러러 보는 인물도 없습니다. 예전처럼 종과 주인의 관계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에 맞는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엔 과학도 일조를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주지 못하면 자연이라도 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하나님을 태양이나 불, 바다로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가스덩어리이고 우리가 잘 이용해야 할 대상이며 주기에 맞추어 움직일 뿐입니다. 불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여 열과 빛을 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불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도 다 압니다. 바다 역시 잘 이용해야 할 자원이며, 인간은 이미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바닥까지 가 보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지는 하나님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구요?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이미지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아이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낳기에 아주 적합한데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될 때까지 점검할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아슬란’이라는 사자입니다. 아슬란은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했으며, 입김을 불어넣어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배신자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쳤으며 나니아의 모든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이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불러 낼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다 해서 항상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니아의 비버는 아슬란을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잠시 대화를 들어 보시죠.

비버 부인이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죠. 만일 아슬란님 앞에서 무릎을 덜덜 떨지 않을 수 있다면 아주 용감한 자거나 바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죠.”
루시가 물었다.
“그럼 안전하지 않단 소리예요?”
비버 씨가 말했다.
“안전이라고요? 지금 우리 집사람이 한 말 못 들었나요? 누가 안전하다고 했죠? 당연히 안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분은 왕이신걸요.”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는 권위의 양면을 얘기해 줍니다. 권위가 있으려면 착하기만 하거나 무섭기만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착하면 무섭지 않고, 무서우면 착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착해지려 노력합니다.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요즘의 미덕입니다. 무서운 부모와 교사 아래 자란 세대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좋게 봐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착한 부모나 교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혼내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죠. 또 요즘 무서운 사람은 다 나쁜 사람입니다. 무서운 부모는 아이를 때리거나, 전혀 용서를 하지 않거나, 감히 말 붙일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부모입니다. 무서운 교사란 매를 들거나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교사입니다. 또 사회에서는 조직폭력배나 권력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죠. 어딜 봐도 착하면서 무서운 존재를 만날 수 없습니다.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

하지만 아슬란은 나니아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착합니다. 엄마가 병에 걸렸고 그게 항상 맘에 걸린 남자아이 앞에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뉘우치면 누구라도 받아줍니다. 또 아슬란은 무섭습니다. 하얀 마녀를 한입에 끝냈으며, 그의 포효 소리 한 번이면 나니아 전체가 두려움에 떱니다. 나니아 국민에겐 아슬란의 뜻을 따르거나 안 따르는 두 가지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의 뜻을 의심하거나 자의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따르는 자는 구원받지만 따르지 않는 자는 죽습니다.

5년 동안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서 아슬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슬란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면 모두 손을 듭니다. ‘얘들아, 아슬란은 엄청 두려운 존재라고 했어. 너희를 잡아 먹을 수도 있어. 그래도 만나고 싶어?’라고 해도 모두 손을 듭니다. ‘아슬란의 갈기에 파묻혀 얼굴을 비비고 싶은 사람?’ 하면 손을 들지 않는 아이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남자아이들로, 그 행동이 여자아이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엔 ‘아슬란의 갈기에까지 파묻힐 필요가 있나’ 했지만 요즘은 바뀌었습니다.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웃다가 소리 지르고 노래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아슬란은 우리가 쉽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 앞에서 무례한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책에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책을 읽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선 루이스가 성공한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말을 들어 보시죠.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그것을 의무라고 여긴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느껴야 한다면 감정은 굳어버리지요. …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교회 창문에 새기거나 주일학교 교리로만 가르치지 말고, 상상의 세계로 보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으로 그런 것들이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어른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은 정의롭고 선하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저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주형틀은 있지만 부을 쇳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 아이들은 아슬란의 포효소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