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Ⅰ.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Ⅱ. 자살의 역사적 이해
Ⅲ. 자살의 원인
Ⅳ. 자살의 유형-(11) 이상향의 자살

이상향의 자살은 죽음을 환상적으로 생각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행위다. 이런 현상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대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 일어난다. 지금의 현실을 뛰어넘으면 거의 완벽한 사회가 존재할 것이라는 이상향은 인간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생각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굴려가며 살아가는 존재일지 모른다. 이런 원리에서는 현실이 작아지면 이상이 커지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상향은 현실이 불합리하고 힘들수록 더욱 가중된다. 그런 생각에 따라 이상향의 자살은 현실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죽음을 도피처 또는 문제를 해결하는 통로나 분출구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그 출구의 하나로 자살을 미화하려는 유혹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데 기초한다. 이상향의 자살에는 다음 몇 가지 유형을 갖는다.

1) 유토피아적 자살

유토피아적 자살은 죽음의 저 편에 이 세상과는 다른 완벽한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데서 시도되는 죽음이다. 그 완벽한 세상이란 불평등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가 온전하게 평가되거나 수용되는 완벽한 조건 아래 있는 이상 사회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의미인데도 그 정신에는 포기할 수 없이 살아있는 점이 놀랍다. 이런 유토피아적 생각은 현실이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울수록 더욱 생각나는 특성이다.

유토피아적 생각은 지금의 현실이 힘들고 고달플수록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 이상향의 세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회피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기술한 애정적인 자살에서 특히 연애적 자살이나 동반적 자살은 이런 이상향의 성향을 포함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이상향의 자살은 개인보다는 이단 종교의 집단 자살의 형태로 시도되는 편이다. 역사적으로는 ‘인민사원’이나 ‘태양의 사원’ 등의 집단 자살이 대표적이다.

1978년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5시 남미 가이아나의 수도 죠지타운에서 집단자살이 일어났다. 그날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Jim Jonse)는 캠프 지역 내 흩어져 있던 신자들을 불러모았다. 존스는 캘리포니아에서 도주한 후 베네수엘라에 가까운 밀림으로 들어가 인민사원을 만들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그가 사회주의적이고 반인종차별적인 참신한 교리를 설파하는데 끌린 사람들이었다. 그때 교주인 짐 존스는 이미 그곳을 조사하려 왔던 미국 국회의원 레오 라이언과 10여명의 기자들을 총살한 후였다. 난감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그는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처치한 사건으로 설명하고, 수습책이 없어 당황하다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모든 신자들과 함께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그들을 위험에서 구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적들이 매우 가까이 왔다. 가이아나 군대가 우리를 습격하고 있다”면서 “모두 함께 모여 저 세상에 가기 위해서는 자기 손으로 죽어야만 한다. 모두들 약속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자! 독약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독약이 든 커다란 통 앞에서 드디어 ‘죽음의 행사’가 거행됐다. 그 행사는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독약을 마시게 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 사이 교주는 위엄을 지닌 채 신자들을 죽음으로 재촉했다. 스피커에서는 귀청을 울리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죽음을 사랑해야지 혐오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들은 내일 모레 부활할 것이다. 오늘 저녁 모두 잠들게 되더라도 모두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이다. 죽음만이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죽음은 어머니다”고 소리치면 신도들은 “정말 우리들은 죽음을 사랑하고 있다”라고 화답하고, ”어머니, 어머니“라고 노래하면서 독을 마셨다고 한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오델로 로스는 그 중 몇 사람에게만 교주의 친위대가 독을 마시게 했을 뿐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기 손으로 독을 마셨다고 했다. 이로써 15세 미만의 어린이 180명을 포함한 918명의 신도들이 집단 자살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물론 순순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교주의 친위대가 누구도 도망갈 수 없도록 포위하고 있었다고 한다. 친위대는 도망하려는 신도들의 손발을 묶고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했다. 이런 ‘죽음의 약속’을 따라 노인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백인도, 흑인도, 아시아인도, 멕시코인도 모두 하나가 되어 죽었다. 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단에 의한 강압적인 죽음이라 봐야 한다. 다만 교주의 이상세계 건설에 찬성하고 따랐던 것이 문제였다. 실제 그들은 처음 교주 짐 존스가 가이아나의 밀림에 유토피아적 사회를 건설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인민사원에서 새로운 생활 규범을 만들어 그 이상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면 유일한 해결책은 집단자살 뿐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죽음의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했는데도 말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허무주의적 자살

허무주의적 자살은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다. 이런 허무주의는 철학에서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의 심연을 직시하는 입장이다. 삶의 진상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사상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자각적인 사상으로서의 허무주의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현대에 걸친 서구 사회의 특유한 사상이다. 이는 서구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후에 도래할 장래 가치를 전망할 수 없는 역사의 위기적 전환기에 소시민층 세계관의 반영으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적 자살은 허무에 기초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삶은 고생해서 사는 것에 비하면 무슨 특별한 것을 획득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살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허무주의적 자살은 처음부터 허무적 사상에 입각해 살던 것이 아니고, 현실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점차 생각이 허무하게 이어진 것이다. 자신을 가로막는 현실이 풀리지 않아서 더욱 절망적이 되고, 삶을 허무한 것으로 결론내리게 된다.

작년 10월 어느 여교수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 여교수는 교수였던 남편이 암으로 사망하자 끝내 견디지 못하고 6개월 후 자살했다.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이 없는 세상이 너무 허무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둘은 너무나 금슬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별이란 반드시 금슬과는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녀는 스무 서너살 정도 되는 아들과 딸을 두고 갔다. 이런 경우 그녀는 처음부터 허무주의를 갖고 산 것이 아니라, 남편이 없는 세상이 허무하게 된 경우다.

이런 점에서는 구직자의 비관 자살도 마찬가지다. 일간지에 보도된 어느 구직자의 자살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그러나 1996년 이후 취직을 못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남길 유산도 없고 아무런 아쉬움도 없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려 한다. 죽으면 화장해 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 유서는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발견됐다. 공부도 많이 했는데 일할 곳이 없는 오늘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더욱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의 허무성은 생의 만년에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허무적 성향은 일반적으로 인생의 나이가 60이 넘으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자주 떠오른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알바레즈는 “나이 든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성향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것 같다”고 하고, 심지어는 “생의 만년에 허무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그들의 목숨을 저버리는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연한 일인지는 모르나 작가들은 이런 허무적 성향과 상당히 결부돼 있는 것 같다. 영국 최초의 문인 자살자인 토머스 채터튼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헤밍웨이, 마야코프스키, 파베제, 플라스 등이 모두 그들의 유년 시절 부친을 여의었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부친의 방법대로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진정한 허무주의는 진실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 경과해야 할 과정이어야만 한다. 허무주의가 인생의 전체적 목표와 목표 달성을 위한 참된 수단이어야지, 원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 허무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결단으로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실존적 노력이 가능하다.

3) 죽음을 예찬하는 자살

죽음을 예찬하는 자살은 삶보다 죽음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 선택하는 행위다. 이들에게는 고단한 삶보다 죽음이 더 고상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 고통과 허무 속으로 방치한 생의 본성을 고발한다. 나는 본성을 파괴할 수 없기에, 삶이란 억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구토가 나서 자살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 불멸을 믿지 못하게 되면 짐승의 수준을 넘어선 성숙하고 발전된 자신을 가진 모든 인간들에게 자살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 말은 도스도예프스키가 한 말이다. 그는 자살이라는 극적인 충동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으나 자기 스스로 성취할 수 있고 참기 힘들게 이끌리는 자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파괴행위를 명쾌하고 고요한 것으로, 그리고 무책임한 것과는 달리 충만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 속에 가장 매혹적이고 독특하고 낭만적인 키릴로프를 만들어 냈고, 이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 그는 키릴로프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살의 스승으로 만들어 자살자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광기나 분노에 의한 극심한 고통의 희생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다. 이때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한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키릴로프, 즉 도스도예프스키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은 여전히 신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것은 둘 중 하나로 “하나님, 혹은 공허”인 것이다. 도스도예프스키 자신이 이런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려 심한 고통을 당한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만일 신이 살아 있다면 모든 것은 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것이고, 누구도 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범한 인간은 자기의 의식으로 신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때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키릴로프는 몇 차례 고심 끝에 영혼은 불멸이 아니고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이런 태도는 도스도예프스키가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은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인간이 행한 전부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고안해냈다”는 어두운 결론을 내리고 만다.

죽음이 삶보다 더 낫다는 생각은 심지어 신 앞에서도 미화되기도 한다. <어떤 비관론자의 앨범>의 작가 알퐁스 라베에게 자살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였다. 그가 죽은 후 5년 후에 출판된 그의 비밀수첩에서는 “존재는 멸망이고 죽음은 삶이다”는 문제를 표출시켰다. 어떤 부분에서 라베는 삶에서 유리된 인간이 올바르게 신성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 파괴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자살은 창조주에게 돌리는 최후의 감사가 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오랜 사고와 철학 덕택에 최후의 행동에서 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상하게 감행하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이런 대목은 자살은 신 앞에서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행위로 보는 관점이다.

죽음을 예찬하는 작가들은 많았다. 카프카는 “자살은 자기 과거의 과오를 씻는 행위로 설명하는 데서 그 선두에 선다. 1913년에 출판된 그의 저작 <판결>에서 주인공 게오르그 벤데만을 통해 그는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아버지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생각이다. “죽을 시간을 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너의 마음 깊은 곳에는 순수한 아이가 있지만, 더 깊은 곳에는 악마가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내가 너에게 물에 빠져 자살하라고 말한 것이다.” 판결이 내려지자 주인공 게오르그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 속에서 서둘러 자살했다.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난간 끝에 붙어있다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강물에 투신했다. 이런 점에서 카프카는 물리적인 자살보다도 더 강한 자살, 즉 자신의 모든 글들을 파괴함으로써 도달하는 문학적인 자살을 꿈꾸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가든 수필가든 철학자든 도덕주의자든 간에 이런 죽음을 예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자살의 합법성을 받아들인 몽테스키외가 있는가 하면, 영국의 존 돈과 스웨덴의 존 로벡은 자살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폴 스카르피아와 베카리아도 자살을 찬성한다. 몽테뉴는 자살이 모든 ‘악의 치료제’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장하고, 카프카는 자살로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살라크루는 역설적으로 자살이 삶과 만나게 된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토마스 모어는 자살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예리한 성찰을 보여준 사람은 빅토르 위고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시인, 깨어진 리라(돈), 사라져 버리는 미래를 보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자살은 단지 휴식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안식을 찾아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했다. 견딜 수 없는 나약함에 솔직해질 수 없었고, 가장 깊고 억압된 감정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자살은 현세의 종결이자 도피이고 삶의 성취가 될 수 있었다. 까뮈의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는 “작가들이 죽을 수 있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며,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미리 예상된 죽음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까뮈가 자살을 의도된 목적과 고요함 속에서 준비된 최후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까뮈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진정으로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인가?’, ‘글쓰기와 죽음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가?’ 등이다. 미셀 뷔토르는 자살과 글쓰기의 애매한 관계로부터 자살의 긍정적인 등가물을 추출해낼 수 없기 때문에 글쓰기는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글쓰기에 의해 오랫동안 ‘발효되고’ 부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단번에 감행된 자살이 운명의 십자로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세우게 된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앙드레 지드는 “나는 문학으로 죽은 사람들은 벌써 자기 자신 안에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미셀 라리스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최고 위험인 ‘죽음’을 감당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그것은 문학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점은 부정성의 결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긍정적으로 글을 쓰는 더 많은 작가들은 인생을 아름다운 것으로 노래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작가들이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4) 모방적 자살

모방적 자살(Copycat suicide)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모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그대로 흉내내 죽는 현상이다. 모방 자살은 대개 유명한 사람의 자살이 있은 후에 잇따라 자살이 일어나는 현상으로,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에 보도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나 연예인 등의 자살보도를 접하고 모방되는 편이다. 이 모방 자살은 최근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이름에서 유래했다.

주인공인 청년 베르테르는 조용한 자연에 묻혀서 우울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어느 아름다운 산간 마을에 찾아간다. 그는 마을 무도회에서 멋진 춤 솜씨를 가진 쾌활한 여인 로테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한다. 춤을 계기로 로테와 친해진 그는 그녀에게 약혼자 알베르트의 이야기를 듣고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로테를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윤리적인 판단과 이성은 잠시 접어둔 채 그녀를 계속 방문하면서 그들은 어느 새 감성이 통하는 다정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로테는 알베르트와 결혼하게 되고 둘은 끝내 사랑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결국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절망한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소설이 19세기 유럽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면서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다. 이처럼 소설 내용이 모방 자살로 뒤따랐던 점을 들어 베르테르 효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모방 자살은 실제로는 자살의 전염성이 강하게 작동한 데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이런 자살에는 동일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남이 죽는 것을 보고 따라 죽는 단순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방 자살은 더 근본적으로는 자살 시도자의 심리적 측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강한 동기를 받고 죽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돼 시도하는 죽음이다. 실제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사람이나 자살 경향이 있는 사람이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에서 강한 정신적 쇼크를 받고 자기도 따라 죽는 경우는 상당히 일어난다. 우리는 얼마 전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있은 후 여러 건의 모방 자살이 일어난 사실을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모방 자살은 역사적으로 여러 건이 일어났다. 이런 모방 자살 시도는 여성이나 아동, 청소년 등이 많은 편이다. 옛날 프랑스 리옹에서 명백한 이유도 없이 단지 죽은 사람을 따라 일어난 자살이야기, 1831년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와 영국 맨스필드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모두 그러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793년 모방 자살에 의해 베르사이유에서만 수백 명이 죽었고, 20세기 초에는 마르세이유에서 처녀들이 잇따라 자살한 것이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톨프가 마리 베세라와 함께 자살했던 사건이 보도된 후에는 상당한 모방 자살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에서까지 여러 커플들이 갑자기 자살했다. 보르도에서는 어떤 장교와 그 애인이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했다. 나도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거울 앞에서 자살했다. 이런 모방 자살은 프랑스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모방 자살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남의 자살을 흉내내는 만큼 먼저 일어났던 자살과 똑같이 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독일의 어느 삼림감독관이 아내와 함께 루드비히 2세가 자살한 장소인 스탄 베르그 호수를 찾아 자살한 것이 그 예다. 그런가 하면 최근이 아닌 까마득한 옛날에 일어났던 죽음을 모방하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노틀담사원탑, 에펠탑, 런던탑,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유명한 건물들은 그만큼 유명한 자살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죽은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그 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절망해서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보통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촉발시키는 것은 시사성이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남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사건이 있은지 이틀 내에 같은 방법으로 자살하기 때문이다.

5) 모방 자살 막기 위해 유명 연예인들 자살 보도 신중해야

이상에서 이상향의 자살을 다뤘다. 이상향의 자살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클수록 위험성이 높아진다. 이런 현상은 물론 살려는 의지가 꺾여버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정신 에너지의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신앙이 무력화돼 자신이 거의 신이 돼 버린 현실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확산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이 더 위력을 떨치도록 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한 신앙으로 삶의 태도를 확고히 하고, 더욱 살아야 할 소명감을 다져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대중 스타들의 자살은 잇따른 모방 자살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은 자아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아동이나 청소년 등은 모방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대중 스타들의 자살보도를 지나치게 다루는 보도 태도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보도를 통해 충동을 받은 소외 계층이나 충동성 강한 청소년들이 모방 자살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오스트리아 소네라는 의사는 자살에 대해 10년간 연구한 끝에 빈의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자살에 대해 신문이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룰수록 사건이 늘어난다고 보고했다. 이는 메스컴이 정보를 쉽게 전달하게 된 오늘 다른 사람의 자살 사건에 대해 마음의 동요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이상향의 자살을 막기 위해 한 마디를 부언해 두고 싶다. 현실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지나친 이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욕심을 버리고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더욱 삶을 즐거운 것으로, 이른바 누림이라는 “향유의 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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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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