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춘 목사(www.dreamel.com 운영자)

부흥기에는 숫자를 늘리고 덩치를 키우고 입술로 외치는 외양 과시전략이 먹혔다. 7, 80년대의 경제성장기에는 기업 경영도 교회 목회도 그러면 됐다. 그러나 지독하게 안타깝지만 부흥기는 이제 간 것 같다. 외양 과시전략의 필연적인 결과다.


지금은 저성장기 내지 침체기다.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 숫자나 덩치나 입방아가 아니라 조용한 잠행이나 죽은 듯한 잠복이어야 한다. ‘리바이벌 1907’을 꿈꿀 수는 있겠지만 과시형 이벤트로 대중을 모으거나 감동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거룩한 기도나 아름다운 회개일지라도 이벤트성 집회가 되는 순간, 자기과시 내지 자기만족의 죄 아래 있게 된다. 드러냄, 나타냄이 아니라 잠행, 잠복이어야 한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두더지처럼 숨어들어야 한다. 위에서 군림하지 말고 밑에서 섬겨야 한다. 위에 드러난 꽃가마가 아름다운 것은 밑에 숨은 가마꾼들이 있기 때문이다.

개국의 위업을 부르짖지 않으시고 한 알의 밀로 땅속에 잠행하신 주님을 생각하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가루 서 말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 밑바닥으로 잠복하는 누룩의 영성을 배우자.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지금은 꼭대기를 향해 날개를 퍼덕이는 이벤트를 벌일 때가 아니다. 조용히 날개를 꺾고 골짜기로 들어가 거기서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고민하고 신음하고 애통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주님처럼 살점을 찢어 나눠야 한다. 십자가 정신의 절정은 자신의 몸을 찢어 나누는 것이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더 큰 날개를 추구하는 한 사회는 교회더러 “똑바로 하라”며 짓밟을 것이다. 십자가 정신이 없는 소금은 이미 소금이 아니기 때문이다(마5:13).

다들 박수갈채를 뒤로 하고 날개를 접고 골짜기로 내려가야 한다. 거기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뒹굴며 고민하며 신음하며 애통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처럼 살과 피를 나눠야 한다.

꼭대기로 올라가지 말고 골짜기로 내려가라. 중심부로 향하지 말고 변두리로 나아가라. 미국으로 가지 말고 강남으로 가지 말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라. 거기서 썩고 죽어라.

낮아져 섬기시고 발을 닦아주시고 죽기까지 하신 주님의 희생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제 영광은 주님만 받으시게 하라. 낮아짐과 고난은 우리 차례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죽은 듯이 잠복하는 것, 이것이 시대정신이다.

목회자들이여, 성도들이여, 날개를 접고 골짜기로 잠복하라. 몸을 찢어 나눠라.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몸을 찢어 나누는 것이다. 거기에 ‘리바이벌 1907’의 비밀이 있다.

주님은 하방운동을 벌이셨다. 하늘에서 땅으로, 변두리로, 십자가로 내려가셨다. 하방운동의 절정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다. 십자가에 낮아짐이 있고 고난이 있고 내어줌이 있다.

이 십자가 정신을 깊이 묵상하라. 부흥을 꿈꾸지 말고 그냥 십자가를 짊어져라. 그것이 부흥의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