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벡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고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창 23:16-18)

아브라함 생애의 마지막 사건은 127세에 세상을 떠난 사라의 매장지를 위해 막벨라 굴을 구입한 일이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친 일(창 22장)이 자녀 문제와 관련된 마지막 시험이었다면, 막벨라 굴 구입(창 23장)은 땅 문제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보여준 마지막 성숙한 모습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62년을 살았지만, 아브라함은 한 치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다. 당시 그의 사회적 신분은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마저 없는 ‘나그네’(게르)요 ‘우거하는 자’(토샤브)였다. 그런데 그에게 매장지를 위한 땅 구입 기회가 왔다. 아브라함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개인 소유지를 마련하였다. 약속받은 가나안 땅 전체에 비하면 극히 적은 한 부분에 불과했지만, 막벨라 굴 구입은 땅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이 보여준 최선이었다. 그런 점에서 막벨라 굴 구입 과정은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신실성과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땅 매입의 기회는 사라의 죽음이라는 슬픈 일에서 비롯되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평생 함께 살아온 인생의 동반자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소유한 신앙의 동반자였다. 127세의 나이로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그녀의 죽음 앞에서 심히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다(창 23:2). 그러나 그는 슬픔을 잠시 뒤로하고 매장지를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막벨라 굴 구입에 나선다. 여러 난관을 거쳐 매장지 굴을 구입한 아브라함은, 마침내 자신의 소유지에 사라를 매장하게 되었다(창 23:19).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창세기 23장은 모두 20절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라의 죽음과 관련된 첫 두 절과 사라의 장례 절차를 보여주는 마지막 두 절을 제외하면, 나머지 16절 모두가 막벨라 굴 구입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창세기 23장의 중심 내용은 사라의 죽음과 장례가 아니라 막벨라 굴 구입이라 할 수 있다.

막벨라 굴 구입 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 헤브론 도시의 원로 모임에서 정식으로 매장지 구입을 청원한 것이다(창 23:3-6). 그는 자신이 땅을 소유할 수 없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 신분임을 밝힌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죽은 부인의 매장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법적인 선처를 요청한다. 각 도시의 최고 의결기관인 원로 모임은 성문에서 회의를 열어 행정 및 사법 문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당시의 그런 모임은 ‘성문회의’라고도 불렸다. 이들 원로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 곧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세운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복을 받고 있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인정하였다. 비록 땅을 소유하지 못한 처지에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존경을 받았다. 그런 영향력과 존경심은 그들의 좋은 묘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무상으로 사용하라는 허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는 것은 묘실의 무상 사용이 아니라 땅을 정식으로 구입하는 것이었다. 헤브론의 원로회의는 아브라함의 첫 번째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한 셈이다.

아브라함의 땅 매입에 대한 집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매장지가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는 막벨라 굴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그 땅 구입을 거듭 요청하였다(창 23:7-9). 이에 원로회의는 아브라함에게 땅 구입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땅 주인인 에브론이 그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창 23:10-11). 아브라함은 무상 제의를 거절하고 정당한 값을 지불하겠다고 고집한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무상 제의를 거절한 것은, 그가 일생을 살면서 지켜온 물질관이기도 했다. 전에 소돔 사람들이 빼앗긴 물건을 모두 가져가라는, 소돔 왕의 제안이 있었을 때도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당시 그의 거절 이유는, 소돔 사람들을 구하게 된 것은 소돔 왕의 정식 요청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막벨라 굴 구입은 정식 계약에 의한 매매관계이기에,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 마땅했다.

막벨라 굴 구입을 위한 마지막 단계는 구입 협상을 마무리짓고 에브론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한 것이다(창 23:16-18). 이 과정에서 주목할 부분은, 아브라함이 땅값을 흥정하지 않고 부르는 값대로 지불했다는 점이다. 당시 근동지방의 매매는 몇 차례씩의 흥정을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다. 오히려 흥정을 전제하기 때문에 처음 내놓는 호가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매매의 통례를 깨고 부르는 값을 그대로 주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준가’(창 23:9)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는 ‘케세프 말레’, 곧 파는 자가 부르는 ‘가득 찬 값’을 의미한다. 개역개정판은 ‘준가’를 ‘충분한 대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아브라함이 지불한 은 400세겔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상당히 큰 액수였다. 세겔은 11g에 해당되는 무게 단위이다. 은 400세겔은 은 4.4kg에 해당된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서 구입한 땅 가격이 17세겔이었고(렘 32:9),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한 비용도 50세겔에 불과하였다(삼하 24:24). 오므리 왕이 사마리아 성 건축을 위하여 세멜에게서 구입한 산 전체 값이 6000세겔이었다(왕상 16:24). 그런 것에 비교하면, 아브라함이 지불한 은 400세겔은 상당히 큰 액수임을 알 수 있다.

손해가 되는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큰 액수의 돈을 아낌없이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구입한 이유는,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약속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성취의 그날을 기다려왔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약속에만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그의 신분이나 주변의 여러 정황으로는 땅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매장지를 구입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가나안에서 최초의 땅을 소유하였다. 그것은 전체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일부분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실현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출발이다. 그리고 땅의 약속을 마음에 안고 자신의 공적인 생애를 마감하는, 아브라함의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