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0장 집단무의식으로서의 원형론(1)

집단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집단무의식은 무의식의 한 부분이지만,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정신적인 특성이다. 개인무의식이 개인이 성장하면서 쌓아온 의식적인 경험이 무의식에 억압되거나 축적된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반면 집단무의식은 옛 조상이 경험했던 의식이 쌓인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정신의 바탕이며 경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는 집단무의식을 고찰함으로써 정신의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 집단무의식의 이해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 das kollektive Unbewusste)은 개인무의식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전 인류에 공통되며, 뇌의 선천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유전적 의미의 무의식이다. 이런 집단무의식은 어느 민족이나 나라, 그리고 문화 등을 초월하여 갖는 인간의 정신적 특성이다.

집단무의식은 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기억과 충동을 포함하는 정신의 한 형태이기에,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무의식과는 구별되며, 원형(原型), 즉 보편적인 원초적 상(像)과 관념을 내포한다. 집단무의식의 가장 바탕에 자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특성은 어떤 것인지 고찰하자.

1) 집단무의식과 원형

융은 개인무의식에 이어 또 다른 발견을 하였다. 그것은 개인무의식과는 다른 것으로, 생물학의 진화와 유전처럼 인간의 정신에도 그런 특성이 있음을 밝혀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바로 집단무의식이라는 존재의 발견이었다.

융은 환자를 분석하면서 개인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집단무의식의 상(像)을 발견한다. 이런 상은 대개 잠재기억(Kryptomnesie)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꿈꾸는 사람이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것의 무의식적인 재회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때로는 고태적인 신의 표상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개인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이런 상은 선재하는 소인이 무엇인지 근거가 밝혀져야 했다. 이것은 잠재기억의 유무에 관계없이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서 자라나 생동적 작용을 발휘하는 순수하고도 올바른 원시적 신상(神像, Gottesbild)이며, 그 작용은 종교심리학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자료를 제공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융은 이런 상(像)을 '개인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없었기에, 전적으로 집단적인 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상은 모든 종족에서 출현하고, 역사적이고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상이었다는 점에서다. 이 상은 특히 자연 그대로의 정신 기능에 다시금 나타난다는 점에서 원형(Archetypus)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러니까 이 원형은 집단적 심상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원상(源像, Urbilder)들에 붙이게 된 것이다. 원형은 이 옛 상들을 다시 산출하는 꿈의 원시적이고 유추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유전된 표상이 아니고 유전된 것들이라고 표현한다.

지금까지의 무의식은 거의 개인적인 측면이었다. 1860년 이후 심리학자들은 의식을 연구해 왔다. 의식의 중심으로서의 자아 및 억압된 정신의 개인무의식은 저장고의 역할이었다. 과학적 심리학이 철학이나 생리학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1890년대에는 무의식의 존재가 프로이트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프로이트는 대개의 경험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여 아동기의 외적인 외상(外傷), 특히 성적인 억압이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성적인 억압은 주로 유아적 경향을 가진 것으로 어린시기의 성장과정이 도덕적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또한 일생을 통해 지속되는 하나의 정신적인 과정이었다. 훗날 프로이트는 이를 어느 정도 수정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성적인 측면은 주요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의 성애론적인 무의식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무의식이란 비단 성적 요소 뿐 아니라, 다른 정신적 측면이 있다는 견해 때문이다. 그리고 융은 그 차이를 밝혀내고자 노력했는데, 그것이 단어연상검사를 통한 콤플렉스의 발견으로 나타났다. 이 콤플렉스는 의식과 무의식에 관계된 것이면서 후술하게 될 집단무의식에도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콤플렉스는 집단무의식의 특성을 갖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무의식에 저장된 후천적인 성격으로서의 특성 때문에 '개인무의식'이라 부를 수 있다는 점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융은 무의식이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비개인적인 것, 유전된 범주나 원형의 형태로 집단적인 것을 한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융은 무의식이 보다 깊은 층에 상대적으로 생동하는 집단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제창하게 되었다. 융의 집단무의식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생겨나게 되었다.

2) 정신의 바탕으로서의 원형

집단무의식이란 인간정신의 근본을 밝힌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정신사를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해낸 것으로 언어와 지리, 문화와 환경을 뛰어넘은 인간 공통에 관계된 정신개념이었다. 이때 원형은 집단무의식과 관련되어 이해된다.

그러면 원형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심리 및 정신에 대하여 선천적인 것으로 본래 또는 최초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 원형은 정신의 맨 처음과 관련되는 '원시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잠재적 이미지이다. 인간은 이 이미지를 조상 대대로의 과거로부터 이어 받는 본연의 인간정신의 특성이다.

물론 집단무의식은 비단 인간에만 국한된 특성은 아니다. 동물이 이 특성이 나타나는 한 동물에도 관계될 수 있거나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집단무의식의 바탕이 되는 원형은 인간이 그 조상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경험하며, 세계에 반응하는 소질 또는 잠재적 가능성인 셈이다.

융은 인간이 뱀에 대한 공포나 어두움에 대한 공포는 학습으로서 된 것이 아닌 경험을 통해 공포를 느끼는 사실을 말한다. 이런 공포의 특성은 이미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인바 경험을 통해 재확인 된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이를 유전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득한 조상들이 무수한 세대를 걸쳐 공포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공포들이 우리의 심리 및 정신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후천적으로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경험의 선재성 때문이다. 선재성의 경험은 태어난 이후의 경험에서 나온 개인적인 특성과는 다른 것으로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신의 특성이다.

이런 점에서 집단무의식, 또는 원형이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으면서 의식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채 선재(先在)하는 정신의 한 특성이다. 그리고 이 선재의 특성은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에 있어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정신적인 특성이다.

그런 이유로 이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의 근원적 유형 또는 원형(Archetype)에 의해 구성되는 특성을 보인다. 이 근원적 유형 또는 원형이란 지리적 차이,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련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유형으로서 신화를 산출하는 그릇이며 우리 마음속의 종교적 원천이다.   

3) 유전적 특성으로서의 원형

원형은 후천적인 특성이 아니기에 유전적인 특성으로 구분해야 한다. 이런 구분은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은 단순히 유전적인 특성으로 간주하자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그것이 얼만큼 유전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따지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그러면 원형을 말할 때 집단무의식의 특성이 인간이면 누구에게서나 발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경험에 따라 그 발견여부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방법으로 생각하며, 느끼며, 지각하며, 행동하는 여러 소질들은 비록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개인의 경험에 의존되어 있다는 점에서다. 특히 집단무의식으로서의 원형은 그 특성이나 소질들 또는 잠재적인 이미지의 발달과 표현은 개인의 환경으로부터의 상당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환경의 자극유무에 따라 더 발달 및 표현되는 차이는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집단무의식으로서의 원형의 특성은 개인의 의식적 실재의 문제에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개인이 태어날 때 미리 가지고 태어나는 이 특성은 개인이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개인이 태어난 세계의 형태는 이미 잠재적 이미지로서 선천적으로 그에게 갖추어져 있는 이 잠재적 이미지는 세계 속에 부합되는 대상들과 동일시됨으로써 의식적인 실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다.

아동에게는 어머니의 잠재적 이미지가 존재해 있기에 아동은 상황에 따라 현실의 어머니를 지각하여 어머니에게 반응함으로써 그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아동에게는 지각과 행동의 취사선택을 결정하는 요인이 이미 잠재적 기억이나 이미지를 합성물로 하는 정신의 특성 속에 존재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아동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많은 경험은 그 의식 및 표현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것은 개인이 쉽게 지각하고 반응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고 해도 어떤 잠재적인 이미지의 의식이나 그리고 그것이 표현되는 기회는 그런 잠재기억이나 경험의 유무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집단무의식의 여러 개념들을 학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집단무의식의 여러 측면을 의식하기 위해서 여러 풍부한 환경과 교육 학습 등의 다양한 경험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원형의 특징    

원형(原型, Archetypus)이란 용어를 융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융이 이것을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 집단무의식에 대한 가설을 제창하였다. 그 후 많은 학자들이 이 말을 이용하여 인간의 심리 및 정신, 작품 및 종교 현상 등의 해석수단으로 삼고 있다.

융은 생애의 마지막에 이 원형을 연구하고 저술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융의 원형론은 주로 인간의 정신 속에 자리하는 근본적인 특성과 관련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융은 원형의 연구를 통하여 인간 정신의 근본적인 특성을 밝히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원형의 존재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원래 형태로서 원형

원형이란 원래적인 형태로서 다른 것의 최초의 모델이다. 다른 종류의 형태들이 원형에 따라 모조되는 최초의 모델인 것이다. 사과나무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지만 사과나무의 원형은 변하지 않는다. 사과의 씨를 심으면 사과의 나무가 자라서 본래 갖는 그 형태의 사과나무로 된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일어나더라도 사과의 형태는 그대로이다. 이런 원형이 정신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정신에서는 매우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특성이 존재하여 정신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하고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원형은 정신에서 집단무의식의 내용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무의식을 거듭하여 고찰하게 되면 때로는 원형이 그 내용물에 의해 결정된다는 잘못된 개념을 만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원형을 무의식적 개념의 일종으로 보는 것인데, 다시 한 번 지적하거니와, 원형은 그 내용물이 아니라 그 형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그 결정의 정도(程度)도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원초적 이미지의 내용은 그것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를 때 구체화되는 것이고, 그래서 의식적 경험의 자료로써 채워지게 되는 것인데, 이는 원형이 집단무의식임을 설명하고 있다.

2) 정신의 깊은 곳에 자리하는 원형

원형이란 집단무의식에 내용이기에 심리 및 정신의 깊은 곳에 자리한다. 융은 거의 40년 동안 이 원형을 연구하는데 집중한 편이다. 그가 발견하여 밝힌 원형에는 출생, 재생, 죽음, 권력, 마법, 영웅, 어린이, 어머니, 사기꾼, 신, 악마, 노현자, 어머니인 대지, 거인, 나무, 태양, 달, 바람, 강, 불, 동물, 많은 자연물, 고리모양, 또는 무기와 같은 인공물 등 여러가지다.

이들 원형에 대하여 융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전형적인 장면과 같은 수효만큼이나 많은 원형이 있다. 이 경험들은 무한히 되풀이 되면서 우리의 정신적 특성 속에 새겨졌다. 그것은 내용이 있는 형식이 아니라, 처음에는 내용이 없는 형식이고 어떤 유형의 지각과 행동의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원형은 특별히 학습을 통해서 알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인식되는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정신의 깊은 곳에 자리함을 상정한다.

이런 원형의 특성은 자신이 잘 인식하지 못하면 전혀 다른 정신의 형태로 지각되기도 한다. 이런 것은 무의식을 동화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항진된 자가도취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를 잘못 인식하여 불필요한 자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근자감)'도 이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분석을 받는 내담자들이 자신의 무의식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최신 정보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통하다고 믿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의기소침하고, 심지어 무의식의 내용에 억눌리게 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자부심은 약화되고 그들은 또한 무의식에서 산출되는 모든 심상치 않은 것들을 체념 속에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전자는 자부심이 넘치는 가운데 자기의 무의식에 책임을 지지만 그 책임의 정도가 지나쳐 현실적 가능성을 넘어버리는데 반해, 후자는 무의식계를 지배하는 운명에 대한 자아의 무기력을 통감하고 낙심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책임 그 자체를 일체 거부하고 마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자는 자기의 행동영역을, 후자는 자기의 고뇌의 범위를 확대하고야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3) 선천적 특성으로서 원형

원형은 선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원형은 처음부터 인간의 정신 속에 완전히 발달된 상태의 심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원형은 인간이 삶에서 경험한 과거의 기억상과 같은 분명한 형상으로 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어머니의 원형이 한 어머니 또는 한 여성으로 양화(陽畵)된 사진이 아님과도 같다. 오히려 원형은 경험에 의하여 형상되어야 할 음화(陰畵)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융은 이에 대하여 "원시적 이미지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은 그것이 의식적으로 된 것으로써 의식적 경험의 자료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을 때이다." 이런 현상은 원형이 집단적 무의식으로써 인간이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공유하는 정신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집단무의식은 어느 문화, 인종, 지리적 차이와 상관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인간본연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형은 집단의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간하지 말아야 한다. 집단공유의 문화적 전통이란 하나의 이념으로, 대개는 교육 및 정치적 이념으로 의식적으로 집단 속에 전승되어 구성되는 것으로서, 집단적 의식(das kollek- tive Bewusstsein)의 내용이다.

우리의 '남녀칠세부동석' 또는 '삼강오륜'(三綱五倫) 등의 관습은 유교의 교육을 통하여 특히 조선조에 강하게 전달된 의식전통의 하나이다. 이는 분명히 한국문화의 전통을 이루고 있었으나 세계성을 지닌 것은 아니며, 또한 초시간적인 진리도 아니다. '효(孝)'에 관련된 문화규범 또한 동양 문화권의 전통이며, 그 집단이 공유하는 관념이다. 이 가운데는 보편적인 부모 자식 간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 자체가 원형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집단적인 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집단적 무의식과 원형은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원형이 집단의식, 민족의식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4) 집단무의식의 깊은 층으로서 원형

원형은 집단무의식을 이루는 깊은 층이다. 원형은 집단무의식의 깊은 층에 자리하기에 좀처럼 직접 밖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원형이 드러날 때는 사람이 놀라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이런 원형에 대하여 이미 생각한 바가 없었던 생소함에다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자신을 엄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험은 매우 드문 것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일생에 몇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특이한 정신적 경험은 자신의 의식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생의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원형의 존재가 그만큼 대단한 힘을 지닌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지각(地殼) 속에 있으면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지구 속의 불덩어리와 같은 것이다. 알 수 없는 이 불덩어리가 화산으로 폭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화산의 존재와 그 위력을 알게 되어 위압과 놀람을 갖는 것이다. 원형이 의식의 표면에 나타날 때도 같은 현상인 것이다.

원형이 막강한 에너지의 힘을 가졌다는 점은 심리 및 정신의 세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원형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는 원초적 폭력(Urgewalt)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런 원형의 힘은 자아로 하여금 통속적인 인간적인 영역을 뛰어넘게 만들기에 자아가 이 힘에 접촉이 되면 팽창되거나 과장되고 자유를 잃으며, 원형의 크나큰 세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창조적인 방향이든 파괴적인 방향이든 자아를 구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 인간이 엄청난 사랑에 사로잡혀 자기를 희생하거나 위대한 창조적 영감에 사로잡혀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가 하면 악마적인 파괴의 화신이 되어 집단살인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형은 때로 일상의 감정을 초월한 신성한 힘이라는 누미노줌(Numinosum)을 내포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초인적이며 비인간적인 충동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매우 종교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교인 중에 '신하고 직통한다.'고 하면서 매우 특별한 신앙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신앙이 깊은 것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원형에 사로잡힌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5) 꿈을 통하여 나타나는 원형

원형은 꿈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꿈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반응과 심리 및 정신의 자연스런 충동을 의식에 전달하는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주변상황, 생활경험 등 주로 자신의 경험세계와 현실에 관련된 꿈을 꾼다. 그러나 이것과는 다르게 '전혀 생소한 것', '처음 보는 뜻밖의 광경', '무시무시한 검은 괴물'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원시성 내지는 고태성을 띠게 되는 특성의 꿈을 꾸는 경우가 있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흉몽' 또는 '악몽', 혹은 지극히 황홀한 '감동적인 꿈'등이 그것이다.

이런 꿈이 바로 원형과 관련된, 즉 원형의 존재를 경험하게 하는 꿈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은 이런 충격적인 꿈을 꾸기도 한다. 원형은 그런 신비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원형이 개인의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이미지, 신화(神話)적 특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형이 꿈에 나타난다는 것은 원형상이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는 대개 일반적인 것이 아닌, 때로는 비현실적인 꿈에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전술한 형태의 이미지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런 꿈은 대개 잊혀지지 않고 매우 생생하게 기억되는 편이다. 기독교인의 경우 때로 이런 꿈은 세상을 구원하는 꿈이나 자신이 대단한 목회자나 전도사로 활약하는 꿈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의 특징은 그 모양은 조금 달라도 대개는 신의 현상을 닮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아들러(A. Adler)의 신경증론에서 힘에의 의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신과 비슷함'(Gottaenlichkeit)이라는 개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신과 비슷함이란 인간의 교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상의 현상을 넘어서는 매우 특별한 상황이나 현실에 비유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과 비슷함이란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꿈에 나타나는 것으로 대단한 사명감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소명감을 갖게 되는 경우이다.

이는 마치 초인의 모습을 가진 자가 그 손에 선과 악이라는 사발을 들고 있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이런 경우의 자신은 마치 자신을 기로에 있는 헤라클레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암초와 소용돌이 사이에 있는 키 없는 배처럼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저 거창한 태초의 인류의 갈등 가운데 처해 있고, 영원한 원리들 사이의 연관성을 고통스럽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마치 코카서스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이는 원형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이 꿈에서 현실의 고통에 처해 있는 자신이 매우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 자처하는 신과 비슷한 사람, 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집단무의식으로서의 원형론에 대하여 기술했다. 집단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했다. 집단무의식은 무의식의 한 부분이지만,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정신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개인무의식이 개인이 성장하면서 쌓아온 의식적인 경험이 무의식에 억압되거나 축적된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반면 집단무의식은 옛 조상이 경험이 경험했던 의식이 쌓인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정신의 바탕이며 경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집단무이식에서 원형을 특성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