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메시야·다윗·아브라함 언약 완성시킬 자
이심 강조하기 위해 붙은 마태복음 고유 타이틀
‘메시야 실천, 다윗 회복, 아브라함 완성한’ 언약

마태를 부르심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마태를 부르심(Caravaggio. The Calling of St. Matthew, 1599-1600, Oil on canvas).

6. 이스라엘 언약의 최종 성취자 예수

이처럼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가 이스라엘 역사를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메시야 언약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을 반영했다면,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마태의 새로운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 언약/다윗 언약/메시야 언약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메시야 언약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로,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말기 아모스와 호세아를, 남유다 말기 이사야, 나훔, 예레미아 등을, 바벨론 귀환 이후 다니엘, 학개, 말라기 등을 보내셨습니다.

이들은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경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후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60회 이상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으로, 다른 복음서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는 구약에 나오는 메시야 언약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야 사역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유다 왕국을 건설할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주로 왕이었기 때문에, 메시야도 왕으로 올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메시야 사역을 왕 대신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대신 담당하러 온 자’(마 9:17; 사 53:4)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정치적·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의 온갖 연약함과 질병을 담당하는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병 고침에 있어 믿음이 있는 자만이 아니라, 보이는 모든 질병을 ‘다’ 고치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과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장 34절, 누가복음 4장 40절을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에게 치유 청원자의 믿음이나 요청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선 모든 질병이 단숨에, 멀리서도, 깨끗하게 낫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었습니다(마 10:1).

이처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 초기 사역 핵심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병 고치는 사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산상강화)이 예수님 가르침의 정수라면, 8-9장(기적의 장)은 예수님 치유의 완결판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후에도 계속되지만, 메시야 사역의 핵심인 치유 사역은 단연 예수님 초기 사역의 꽃입니다.

다윗
▲하프를 켜는 다윗 조각상. ⓒ인터넷 캡처
2) 다윗 언약

영원히 다윗 후손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다윗 언약은 남유다 왕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B.C. 586년 바벨론 유수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지켜지지 못하는 언약이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언약을 이을 메시야가 오기를 고대하였으며, 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이 땅의 왕국 대신 ‘하늘나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였습니다.

이후 천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 내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아버지와 아들이 통치하는 나라로 마태복음 13장(천국 비유)이나 24-25장(종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온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태복음은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이 혈통상으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장자 계보를 잇는 후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약을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왔으며,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이제 다시 다윗 언약이 회복되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다윗 언약 성취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은 천사가 전하여 준 ‘예수’라는 이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즉 마태는 ‘예수’라는 이름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을 뛰어넘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세계의 왕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라는 것은 동방박사들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멀리 동방에서 왔으며,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탄생을 두려워한 헤롯은 아기 예수 살해에 실패하자 인근의 두 살 이하 어린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줄 알았고, 심지어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을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마 20:20-23).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핵심 내용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죄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바나바라는 악명 높은 강도까지 동원하지만, 예수를 죽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압박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 갈대, 홍포를 입히우고 ‘네가 이스라엘 왕이냐’라고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십자가 꼭대기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까지 붙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재림 때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국의 주인(왕)으로 오신다는 것으로, 마지막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양과 염소를 심판할 것입니다(마 25:31-46). 즉 예수님은 재림 때 심판주로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의 왕의 역할을 할 것이며 이는 다윗 언약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 ⓒ인터넷 캡처
3) 아브라함 언약

보통 누가복음은 이방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유대적이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유대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많은 이방인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족보를 매우 중시하는데, 족보에 여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 여인들이 네 명이나 등장합니다.

족보에 여자가 그것도 이방 여자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지만, 더 파격적인 것은 이 여인들 모두 결코 순결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구속사에서는 나름 역할을 했던 이방 여인들입니다.

또 예수님은 유대 하인의 병을 고치려는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면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보지 못한 믿음(마 8:10-12)”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도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방인들에게도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도 그 믿음을 보고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15:21-28).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냉혹한 반응에도, “개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는 이 여인의 믿음은 하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백부장의 믿음처럼 결코 이스라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이 외에도 많은 이방인들이 등장하지만, 이방인의 입으로 한 최고의 고백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십자가 밑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과 그 부하들의 고백입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마저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쳤을 때,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백부장을 포함한 다수 이방인의 증거는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준비가 무르익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마태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은 마태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명(Great Commission)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 28:18-20).

이 대사명은 예수님 3년 공생애의 결론으로 그 핵심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복음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언약이 완성될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이 언약 성취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즉 제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그 언약이 완성될 때까지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또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임마누엘; 마 1:23).

이는 언약의 완성자가 예수님 자신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으로, 이 언약이 완성되는 날은 곧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누가
▲발랭탱 드 블로냐의 ‘성자 누가(Valentin de Boulogne, 1625, Oil on wood panel)’.
7. 마태복음 1장 1절의 역할

이처럼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언약 성취의 역사, 즉 예수님이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메시야 언약을 최종적으로 성취하는 세 단계의 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태의 역사 인식이 잘 드러나는 또 다른 곳이 바로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매우 간단해 보이는 구절이지만, 해석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은 예수와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즉 관용어인 ‘예수 그리스도’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 예수’로 볼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를 위하여 영어 번역본들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This is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NIV)
- An account of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NRS)
-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NAS)
-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NAB)

이 영어 번역본들을 비교하면, NIV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가 ‘메시야’이고, ‘다윗 자손’이며, ‘아브라함 자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이며 다윗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면 NIV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용화된 기독교의 표현을 사용하여, 마치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분명 동시에 둘 다 모두 맞는 해석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용어를 사복음서에서 이 곳 말고는 사용된 적이 없다는 점(예외: 마 1:18, 막 1:1)에서, NIV의 해석은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 있는 이 관용어는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 대상으로 신뢰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으며, 마가복음 1장 1절은 마태복음 1장 1절처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 아들인 예수’라고 읽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용어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처럼 보입니다.

복음서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보여주고자 쓰여진 것인데, 제목 역할을 하는 마태복음 1장 1절이나 마가복음 1장 1절에 관용어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이는 이 관용어에 익숙해진 후대들의 해석 오류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예수님을 ‘메시야,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하였을까요? 이는 바로 예수님이 메시야 언약, 다윗 언약, 아브라함 언약을 완성시킬 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붙여진 마태복음 고유의 타이틀입니다.

즉 예수님이 ‘메시야 언약’을 실천하며, ‘다윗 언약’을 회복하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완성시킬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하여 쓰여진 세 개의 타이틀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헬라어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네시스(γένεσις)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①족보 ②탄생 ③역사.

이 헬라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마태 신학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습니다. 고대에는 보통 책의 제목을 다는 대신, 첫 문장을 제목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족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마태복음 1장 1절이 예수님의 42대 족보가 나오는 1장 2-17절을 포괄하는 제목으로 봅니다. 또 ‘탄생’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묘사된 1장 2절-2장 23절을 포괄하는 제목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사’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마태복음 전체를 포괄하는 제목으로 보는 것이며,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의 족보가 예수님을 메시야 언약, 다윗 언약,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자로 그린 것이라면, 게네시스를 ‘역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모든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것이며, 이를 기록한 책은 이스라엘 역사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역사책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태
▲성경을 쓰는 마태. ⓒ인터넷 캡처
8. 맺는 말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역사는 궁극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이 열방의 모범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메시야 언약까지 맺으며 언약의 성취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차매 하나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언약의 완성자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메시야 언약과 다윗 언약을 성취하셨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마태복음 28장의 대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열방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언약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열방이 받는 복의 핵심 내용은 바로 ‘피의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흘린 피가 자신의 죄를 위한 것이었는지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다는 ‘피의 언약’을 통하여, 예수님은 재림 때까지 아브라함 언약 성취에 정성을 다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이 언약의 완성은 대사명에 기록된 그대로 모든 민족이 예수님 제자가 될 때 성취될 것입니다.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어떤 자연환경 속에서 형성됐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