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말하다 이규현
설교를 말하다

이규현 | 두란노 | 216쪽 | 12,000원

이규현 목사의 목회론에 이어 설교론을 펼쳤다. 한 설교자가 들려주는 설교에 대한 개념들과 정의들은 말씀을 전하며 살아가는 설교자들에게 뼈와 살이 된다.

이 책은 그동안 그가 설교자와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전하였는지, 그의 목회와 삶을 녹여 설교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목회론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평범한 대형교회 목사라기보다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자신의 사상을 전하고 사람을 키울 수 있는 거목이 된 것 같다.

이규현 목사는 현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다. 그는 현대인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 나오지만,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성도들이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물건을 고르듯 설교를 소비하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본인의 교회와 성도를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신의 설교로 은혜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과 문제를 철저히 분석할 것을 경고한다.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성도들이 어떤 태도로 말씀을 듣고 있는지, 영상을 통해 확인해 봐야 한다.”

과연 이 말대로 예배 후에 녹화된 영상으로 성도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담한 설교자가 몇 명이나 될까?

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멍 때리는 교인도 있을 것이고, 핸드폰으로 검색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설교에 집중하고 은혜를 받고 있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그는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라고 한다. 설교의 위기가 찾아온 것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1차적으로 설교자 자신이 설교에 모든 것을 쏟아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목회자는 묵상가와 설교자의 이미지보다 활동가와 기획자의 이미지가 더 그려지니, 필자는 그의 진단이 맞다고 판단한다. 말씀 목회에 전념하기보다, 외적인 것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본다.

본문 중심

그의 설교론을 보며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세 가지로 정리해 보려 한다.

먼저 이규현 목사는 철저히 본문 중심의 설교를 고수한다. 우리는 설교자의 성향과 지식과 성격과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전달자의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무슨 말을 어디서 어떻게 끄집어내고 있는지 살펴야 하고, 왜 그 말을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요즘 성도들은 지식과 수준이 높아서 설교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다.

저자는 월터 브루그만의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만큼 설교자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의 비경으로 들어가지 못한 설교자는 회중을 같은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다.

회중은 설교자가 하나님과의 깊은 흔적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지, 준비 없이 말장난을 하는지 교회의 목적을 위해 선동하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안다. 회중은 설교자로부터 본문을 듣고 싶어한다.

회중이 교회에 올 때 휴대전화로 다른 교회의 설교를 듣고 오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이유가 본 교회의 설교자를 통해 은혜를 못받기 때문이라면,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무책임한 설교는 본문을 무시하고 가리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상황과 성도의 필요와 청중의 대상에 따라 주제 설교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본문이 사라진 내용이라면, 청중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본문을 다뤄야 집중력과 힘이 있고 흐름이 생기는데, 본문이 빠진 설교는 힘없는 말잔치가 될 가능성이 짙다.

말씀과 씨름하라

요즘 시대처럼 말씀 연구와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좋은 시절이 없었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면 다양한 통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상한 설교도 많지만 훌륭한 설교도 있기에, 추천을 받아서 들으며 읽으며 은혜도 받을 수 있다. 유익한 설교집도 있기에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가 먼저 본문에 젖어있지 못하고 2차 자료들로 준비하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저자는 설교자들에게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점검하라고 한다. 자료만 참고하고 남의 것을 복사해서 전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담임이 되어서도 그렇게 말씀을 전하게 된다. 표절이 나오고 설교의 능력이 없는 것은, 가져다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은 고치기 힘들고 담임이 되어도 지속되기에, 빨리 고칠 것을 요청한다. 유진 피터슨은 “분주함은 배교적 행위”라고 말했는데, 저자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하고, 필자 또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목회자에게 설교자의 이미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무엇인가를 기획해야 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동기부여 하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1990-2000년대 한때 유행했던 신학이 실종된 교회관이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교회의 모습이라 여긴다. 그때 교회가 기업적 이미지로 성장했기에, 거구가 된 교회의 모습이 시대를 압도하게 보이는 착각에 지금도 그런 교회를 꿈꾸는 것 같다.

그러나 목회자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기업가적 이미지는 목회자가 가져야 될 이미지가 아니다. 목회자는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자이기에, 청중들이 세상의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목자의 소리로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수영로 이규현
▲이규현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유튜브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본문과 치열하게 씨름해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영적 전쟁이다. 현란하고 혼란한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강단에서부터 이 전쟁에 대한 승리가 선포되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성도를 향한 최고의 심방과 섬김과 사랑은 설교다.” 이 말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인간적 도움과 위로를 원하는 게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만남을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는 자들이다.

저자는 야곱이 씨름한 것처럼 목회자가 말씀과 철저히 씨름할 것을 요청한다. 설교를 위해 투자하고 연구하고 묵상한 만큼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의 목회론에서도 나오지만, 목회자는 고독한 시간으로 자신을 밀어넣어야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저자는 말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고,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몸이 설교를 위한 삶으로 습관화되어 있고, 연구와 묵상도 설교를 위해 집중되고 있다. 입술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지는 그의 설교를 위한 씨름과 가르침이 귀감이 되고 모델이 된다.

교감하라

본 책은 이미 언급했듯, 설교에 대한 저자의 이론과 준비와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한 유익한 내용이 많다. 그리고 하나를 더 제시한다면, 청중에 대한 이해이다.

저자는 청중을 향해 죄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와 함께 청중이 누구이고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된다고 한다. 그런 이해 없이 설교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허공을 치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저자의 설교를 실제로 세 편 들어보았다. 여러 장점을 말할 수 있지만, 설교 세 편을 통해 느낀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분석적이라는 것이다. 본문 분석이 철저하고 시대의 분석이 정확하다. 시대의 정신과 사조와 경향과 흐름이 어떠한지 청중이 어떤 문화에 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흐르는 물에 떠밀려 가고 있는 자들에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또 하나는 청중을 이해하고 청중과 교감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목회자가 강단에 섰다는 것만으로 은혜받는 시대는 사라졌다. 실제 그 권위 하나만으로 설교해서도 안되고 영혼을 섬겨서도 안 된다.

목사라는 직분이 우스워지는 이유가 그 직분에 걸맞은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특별한 직분은 내가 강조할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종이라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저자의 설교를 들으니, 청중과 소통하고 교감한다. 억지로 아멘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절로 아멘이 터진다. 아멘과 마음을 유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청중이 공감하면서 그 말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담임이라는 이유로 강단에 서서 아멘과 변화와 헌신을 강요하면 상처가 될 수 있는데, 저자에게는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오히려 흘러넘침이 전달되도록 집중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설교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에 큰 소리를 외치면 좋겠다는 인상도 있었지만, 저자는 외치는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결론

설교는 도박이 아니다. 설교를 위해 살아오지 못했는데, 강단에 섰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지 않았는데 설교를 해야 하니, 성령님 역사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응답되지 않는다.

내가 열심과 열정과 정성을 다한 만큼, 성령님께서 그 진실함과 정직함에 감동하여 나보다 더 크게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과 어긋난 마음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속이는 행위이다.

저자는 말한다. “설교를 쉽게 하지마라.”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설교를 쉽게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능력이 없고 영혼에 은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몸에도 인스턴트 식품이 순간의 맛을 주어도 뼈와 살의 형성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몸을 병들게 하듯이, 인스턴트 같은 설교는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만든다.

은혜로 풍성하게 젖고 하나님 나라가 그려지는 말씀이여야 하는데 전자렌지로 만들어진 설교가 우리의 영혼과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설교로 도박하면 안 된다. 준비 안 된 모습으로 올라갔다가, 어쩌다 한 번 특별한 은혜를 주실 수 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하나님이 설교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의 흔적을 가지고 서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 눈물로 준비하고 엎드린 만큼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신다. 설교 한 방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성실함과 진실함이 성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