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
▲일본군이 불을 질러 폐허가 된 제암리 마을 모습.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셋째, 3.1운동을 정의함에 있어서 그것이 ‘운동’인가 아니면 ‘혁명’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지금까지 ‘3.1운동’(三一運動, Samil Independent Movement)은 ‘3·1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 혹은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하여, ‘3.1혁명’(革命)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1930년대 이전에도 혁명으로 칭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3.1만세사건을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로 일어난 반일 자주독립운동으로만 보지 않고, 군주제에 반대하며 ‘민주공화제’ 혹은 ‘민주공화국’ 건설을 의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3.1만세사건의 ‘혁명성’을 강조한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 이후 헌법 제정 당시 헌법전문 초안에서도 ‘3.1혁명’으로 표현된 바 있으나 심의과정에서 ‘3.1운동’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만세사건은 ‘3.1운동’ 이란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다 이현희(李炫熙, 1937- )는 2007년부터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경험케 한 사건으로서 ‘3.1혁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후 2014년 2월, 3.1운동 95주년을 기념해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이를 공론화한 바 있고, 기독교인인 윤경로 이만열 등은 ‘3.1혁명’으로 지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경로는 “중국의 신해혁명과 3.1혁명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3.1혁명은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지난 2019년 3월 8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헌법학회와 국회입법조사처 주최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과 헌법의 과제’ 학술대회에서 인하대 정상우 교수 또한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 차원을 넘어 주권재민 실현과 민주공화국 건설을 지향하는 혁명의 성격을 지녔다”면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진보 계열 인사들이 운동이 아닌 혁명으로 칭하면서, 오늘의 한국 현실에 대한 저항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해방 직후 좌파 인사들에 의해 발간된 『朝鮮解放史(3.1운동 편)』 에서는 3.1운동은 특히 노동자, 빈농, 농상공의 소 부르조아층이 추진한 인민 운동으로 정의하고, 천도교나 기독교의 기여는 부정했다.

북한은 삼일운동을 ‘3.1인민봉기’라 부르고 있고, “탁월한 수령의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만세운동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3.1운동을 폄하하여 2월 28일 “3.1인민봉기는 청원과 외세의존에 물젖은 상층인물들의 잘못된 지도로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쓰디쓴 실패의 교훈만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9월 평양 방문 당시 김정은과 ‘3.1절 남북한 공동행사’를 개최키로 한 바 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삼일운동 자체를 평가절하한 것이다.

3.1운동의 주도세력은 천도교인가? 기독교인가?

넷째, 삼일운동의 중심세력은 천도교인가 아니면 기독교인가 하는 점 또한 논란의 중심에 있다.

기독교계는 기독교회의 기여와 역할을 강조하지만, 천도교는 만세운동에 있어 천도교의 주도성을 강조한다. 일반 사학계는 민족종교로 간주될 수 있는 ‘천도교의 주도’에 동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 면에서 볼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은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보면 3종교가 연합한 운동임을 알 수 있으나, 만세운동의 준비단계에서 시위 거사 단계에서 불교의 역할은 미미했으므로 사실상 천도교와 기독교가 중심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을 보면 손병희(孫秉熙)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백용성(白龍城) 순으로 되어 있다. 이는 종교면에서 천도교 장로교 감리교 불교 순으로 그 대표자를 명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을 천도교 장로교 감리교 불교 순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불교의 관여와 영향력은 미미했음으로 사실상 삼일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고 이 두 종교집단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시위자 피검자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 측은 천도교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종속적 관계에서 해석한다. 반면 기독교계는 기독교의 기여와 역할을 중시한다. 그래서 천도교가 선도(先導)하고 기독교가 주도(主導)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삼일운동은 거의 동시적으로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세계 정서를 인식하고 만세운동을 처음 준비한 세력은 평안도 이승훈 중심의 장로교계였다.

최린이 손명희를 찾아갔을 때, 이미 기독교계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최린이 천도교가 함께 동참하지 않으면 민족종교로 인식될 수 없다는 충고를 듣고, 손병희가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시간적으로 기독교계가 천도교에 앞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가 준비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된 것은 손병희라는 인물과 천도교가 거사 자금을 부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만세운동의 준비단계, 2.1 무오 독립선언,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등에서와 만세 거사 단계와 확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회였다. 기독교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도 천도교인들이 아니라 기독교계 인사와 기독교 학교들이었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전국 8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바로 기독교회 중심이었다. 평안도는 전적으로 기독교계가 주도하였고, 경상도 지역의 경우 천도교의 기여나 참여는 미미했다.

실제로 삼일운동을 주도한 주도세력에 대한 통계를 보면 기독교 주도 지역이 천도교 지역보다 월등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피검자는 체포자 등 통계에 나타난 종교적 배경에서도 기독교가 천도교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17%를 차지하지만, 기독교보다 적어도 5배 혹은 15배 많은 천도교인 피해자는 11%에 불과했다.

정리하면 3.1 운동에서 준비단계에서 기독교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고, 거사 실행단계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협력했으나 기독교 세가 우세했고, 후속 단계에 해당하는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중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교총 3.1운동 기념예배
▲최근 한국교회총연합회(대표회장 소강석·이철·장종현, 이하 한교총)이 주최한 3.1운동 102주년 기념예배. ⓒ한교총
기독교의 역할은 미미했는가?

다섯째, 기독교의 역할은 미미했는가? 일반 사학계의 기독교, 혹은 기독교계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특히 좌파적 연구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일반 사학계의 기독교계의 기여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없지 않다. 예컨대, 3.1문화재단이 펴낸 『이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3.1운동 새로 읽기』 (서울: 예지, 2015)를 보면 3.1운동에 있어 기독교의 역할을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계의 역할이 분명함에도 ‘종교계’라고 기술함으로서, 기독교라고 적시하지 않고 있다.

시위의 확산에 있어 기독교가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간단하게 기술하지만, 그것을 천도교와 묶어 언급하면서 종교인들의 역할로 기술하고 있다(78쪽 등). 이북지방에서의 만세 시위와 관련하여 오산, 숭실, 신성, 양덕, 숭덕, 영실학교 등 지역 거점 기독교 학교를 열거한 후 ‘종교계 학교’로 기술함으로 기독교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

3.1운동 백주년 기념 한일공동연구로 출판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 체제』(서울: 지식산업사, 2019)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3.1운동 100년, 1 메타역사』(서울: 휴머니스트, 2019)에서도 동일하다. 박찬승의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서울: 다실초당, 2019)에서는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서의 기독교의 관여를 언급하고 있으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중국 일본에서의 만세운동 주도자들의 기독교적 배경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서 기독교회의 역할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사학계의 일반적 관행이 되고 있다. 종교계의 역할을 기술할 경우에도 천도교를 중시하고,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짙다.

기독교계는 3.1운동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편찬한 바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3.1독립운동과 기독교』라는 자료집, 곧 신문기사편, 기독교인 판결문편, 영문선교사 자료편 등 3권을 출판한 바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3.1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을 출판했다(2017. 10). 이 자료집에서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기독교 관련 3.1운동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인물편 3권, 문화유산편 1권 등 모두 4권(총 2,411페이지)으로 엮었는데, 2천여 명의 3.1운동 관련 기독교인에 대한 자료가 게재되었다.

또 3.1운동 관련 기독교인 판결문(298건 A4 2,884매), 선교사 문서(464건), 기독신보, 독립신문, 신한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5,947건), 기독교 3.1운동 일지(685건), 그리고 회고, 증언, 서간, 논문, 저서 등을 정리했다.

이런 문헌들이 향후 3.1운동 연구에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3.1운동에 대한 기독교계의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NCCK 신학위원회는 『3.1정신과 한반도 평화』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으나, 3.1운동에 있어 기독교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3.1운동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보다는 정치적 의미 규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복음주의권의 박명수 교수 등의 창의적인 연구가 수행되었지만,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3.1운동에 대한 기독교회의 관여와 기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계속>

이상규
▲이상규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상규 박사
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