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919년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본지(크리스천투데이)는 지난 3월 12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이상규 박사님(백석대 석좌교수)께서 발표한 뒤 재정리하신 ‘뒤돌아보는 3.1운동, 기독교, 한국교회’ 기고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시작하면서

3.1운동은 소수 엘리트 그룹의 주도적인 준비와 대중적 호응으로 일어난 만세 독립운동으로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도 비교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3.1운동은 독립의식, 자유 민주 평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었고, 사회의식의 변화, 여성의 재발견, 실력양성론의 대두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 등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고, 그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또 3.1운동은 다섯 가지 정신, 곧 자유와 독립정신, 민주정신, 대동단결 연합정신, 평등정신, 비폭력 저항정신을 보여준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평양에 주재했던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Moore, 1874-1963)은 “조선인의 삼일운동 후 일 년 간의 사상적 진보는 50년의 진보와 같은 진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3.1운동은 민족적 해방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3.1절을 중시해 왔고, 매년 3월 첫 주에는 기념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등과 관련하여 여러 행사가 거행되었고, 또 여러 학술단체의 다양한 학술 모임도 개최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삼일운동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필자가 아는 한 40여 편 이상의 단행본과 200편 이상의 학술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여기서 3.1운동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에게는 새로운 그 무엇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이 글에서는 3.1운동에 관한 범람하는 연학의 물결을 뒤로 하고, ‘100주년’이라는 카이로스적인 기념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간의 3.1운동 논의에 대해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간의 3.1운동 연구에 대한 평가(A Review)라고 할 수 있다.

먼저 3.1운동에 대한 일반 학계의 논쟁점이 무엇이었던가를 소개한 후, 기독교계에서 3.1운동을 어떻게 인식해 왔던가에 대해 정리하고, 그렇다면 기독교회는 왜 3.1운동을 중시해왔던가를 지적함으로써, 3.1운동과 기독교와의 관련성 등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뒤돌아보고자 한다.

1. 3.1운동 연구에서의 쟁점

지금까지의 3.1운동사 이해에 있어서 몇 가지 상반된 의견이 있어왔는데, 이 점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로 소개하고자 한다.

내인론과 외인론, 기회론

첫째, 삼일운동 발발에 영향을 준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인데, 내인론(內因論)과 외인론(外因論), 그리고 기회론(機會論)이 있었다.

만세운동 준비단계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혹은 러시아 혁명과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가 우리나라 삼일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외인론과,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내인론, 그리고 윌슨의 자결주의는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된다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이용했다는 이른바 기회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3.1운동에서 지도부를 형성한 소수의 엘리트 그룹은 국제정세에 민감했고, 그것이 삼일운동의 시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거사에 참여한 주도적인 세력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이 국제 정세에 민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윌슨의 자결주의가 민중동원의 실제적인 동력원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 주된 쟁점이었다.

내인론자들은 민족자결론과의 연계 자체가 거국적 3.1운동의 민족적 역량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3.1운동을 민족사적 주체에서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있으나,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지 않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연쇄적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시대정신이나 그 시대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 입장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19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출범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11월에는 독일에서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1920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특히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1918)과 함께 세계 정세의 큰 변화가 예견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국제 정세가 조선인의 독립의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민족자결주의는 만세운동의 점화 과정에서 영향을 끼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자결주의를 알고 있었고,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 천도교계 인물들과 이승훈 신홍식, 함태영, 이갑성 등 기독교계 인사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3.1운동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자결주의만이 아니라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폭정과 박해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상호 연쇄하여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외인론과 내인론은 상호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사 사건의 원인이나 전개 과정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였던 모습. ⓒ독립기념관

3.1운동의 주체는 민족대표인가, 민중인가?

둘째, 삼일운동을 이끌어갈 주체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만세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 운동을 실제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다수의 민중 세력인가?

만세운동의 외연에 있어, 주도적인 세력은 누구였는가 대한 이견이었다. 일반적으로 민족대표의 선두적 역할을 인정하되, 만세운동의 실제적 중심 세력은 민중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족대표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중사관의 대두로 민족대표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만세운동은 민중운동임을 강조하여, 33인의 역할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입장이었다. 정연태 이지원 이윤상은 ‘3.1운동의 전개양상과 참가계층’이란 글에서 이런 입장을 취했다.

이와 같은 대립된 견해는 3.1운동의 전 과정을 ‘단계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만세운동은 초기 조직화 단계와 거사 실행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은 초기 조직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대중운동화 단계에서는 민중들이 만세운동의 전개와 확산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은 준비 단계, 거사 실행 단계로 구분될 수 있는데, 초기 조직화 단계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말하는 3.1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대중들의 거사 실행단계가 없었다면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양자를 선택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019년 1월 김명혁 이상규
▲이상규 박사. ⓒ크투 DB
이상규 박사
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