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탐구 수업
인간 탐구 수업

서순범 | 샘솟는기쁨 | 300쪽 | 18,000원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본 세계 명작 12편’. 가장 예리하고 정확하게 이 책을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주제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며, 다른 하나는 ‘명작’으로 표현된 현대소설이다. 즉 이 책은 최고의 명작으로 알려진 12편의 근현대 소설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다시 읽기다.

필자는 소설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이 갖는 위력은 대단하다. 서울대 대학생 권장서 100권 중 48권은 소설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른 기관이나 부서에서 추천하는 목록의 대다수는 소설이다.

문제는 추천 목록에 올라간 많은 소설들이,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읽기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다분하다는 점이다. 자칫 잘못 읽으면 엉뚱한 이해를 하게 될 수 있다.

엄마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가 식칼을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기겁을 하고 빼앗을 것이다.

이러한 염려를 요즘 청년들은 ‘꼰대’ 또는 ‘라떼’ 쯤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온갖 살인과 섹스가 난무하는 소설을 ‘고전’이란 이름으로 아직 아무런 기준도 바로 서지 않은 1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읽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부모라면 그러한 소설을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이가 불가피하게 읽어야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는 해야 하지 않을까? 과한 염려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자식을 둔 부모라면 자연스럽게 드는 고민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한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자녀를 기르는 크리스천 부모와 교사의 마음으로 써 내려간 명작 소설의 비평서이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교회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대안학교에서, 기독교인 독서 모임 등에서 활용하면 딱 좋은 내용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가 기독교 대안학교인 정원국제학교 설립자요 독서 모임의 인도자이다. 목사로, 출판사 에디터로, 선교사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현역이다.

자, 그가 말하는 비평적 소설 읽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모든 소설을 다 소개하면 독자가 읽어야 할 분량까지 빼앗을 수 있으니, 한 편의 소설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물론 소설의 문외한인 필자가 읽은 소설에 한해서다.

위대한 개츠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중 개츠비 역을 맡은 디카프리오의 모습.
첫 번째 소설, 위대한 개츠비
“인간, 위대함을 꿈꾸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드는 생각은 ‘이렇게 유명한 소설이 이렇게 재미없다니’, 딱 거기까지였다.

물론 독자마다 성향이 다르고 읽는 관점이 다르니 누구를 판단할 일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연 유명한 만큼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래도 누군가의 소개 글이나 서평을 읽고 읽은 것처럼 착각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마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처럼. 필자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이를 악물며 절반 정도 읽다, 포기하고 말았다.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읽는 데 익숙하고 철학책을 즐겨 읽지만, 칸트의 책은 아니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때 칸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는 단지 재미없음으로만 느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기독교인으로서 갖는 묘한 반감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로 인해 명작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피하고자, <위대한 개츠비>에 관련된 다양한 서평과 평가, 교수들의 강의와 논문까지 찾아 읽었다. 소설 자체는 재미없었지만, 해석은 위대했다.

<위대한 개츠비>는 즉물적이고 즉흥적 사랑에 빠져있던 당대를 풍자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풍비박산이 났지만, 그 덕에 미국은 유럽을 재건하기 위한 물자를 제공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수많은 돈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짧은 기간에 거부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쾌락과 속물적 근성에 자신을 내던진다. 이러한 풍조가 만연한 시대 속에, 주인공인 개츠비는 밀주업을 통해 거부가 된다. 그러나 그는 당대 사람들과 달랐다. “변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을 추구(37쪽)”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에 제동을 건다. 아니,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해석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순수한 사랑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람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불륜을 사랑으로 포장하고 있으며, 허락되지 않는 탐욕을 원초적 본성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아름다운 불륜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성경은 불륜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탐내는 욕심’이라고 한다. 성경은 불륜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그것을 생각지도 말아야 할 죄라고 선언한다(26쪽).”

누군가는 저자의 관점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소설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다. 철저히 기록된 성경의 관점으로 소설 속의 오류와 미화될 수 있는 잘못된 부분을 설명한다.

실제로 소설 저자인 F. 스콧 피츠제럴드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충분히 속을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가장 난감했던 부분은, ‘그럼 나는 뭘 해야 할까?’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지?’라는 자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책은 나 같은 소설 문외한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백하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고 참고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밑줄 친 문장

소설의 낭만이라는 덫을 조심하라.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을 끝까지 얻으려 하는 욕망이며, 이미 타인의 아내가 된 여인을 포기할 줄 모르는 집착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절제가 위대한 삶의 자세이다.(36쪽)

사실 사람은 누구나 일탈을 꿈꾸며 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이 자신에게 드리우는 무거움을 배신’하고 ‘선 밖으로 벗어나는 탈선’을 꿈꾼다. 선 밖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이나 양심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을 꿈꾸기도 한다.(53쪽)

결국 싱클레어는 선한 사람들, 빛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그들을 이기는 것이고, 그것이 가인이 받은 표식, 곧 강함의 능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악도 허용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101쪽)

하나님은 인간을 속박하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은 인간을 지키고 보호하시기를 원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법을 주시는 이유다.(127쪽)

※책에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톰 슐만의 <죽은 시인의 사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기 드 모파상의 <벨아미>, 조지 오웰의〈1984〉,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등 12권의 고전 소설을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