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8: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우리가 매우 잘 아는 한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용서받는 이야기입니다. 이 안에 구원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을 공부하듯이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를 위해 산다고 할 때, 먼저는 구원에 관한 깊은 이해와 확신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힘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대사명을 요즘 많이 묵상하는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평생의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 ‘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우리 내면의 확신과 기쁨과 은혜가 없으면 그 크고 놀라운 비전들도 나와 먼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그 비전을 위해 살아갈 의지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을 깊이 사경해 봅시다.

요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죄를 지었는데 현장에서 잡혔으니, 틀림없는 범인입니다. 변명이 불가능한 현행범입니다. 그러면 법의 치리를 받아야 합니다. 여자를 붙잡아온 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여기서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레위기 20장 10절입니다.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또 레위기 22장 22절에도 있습니다. “간음한 자 둘 다를 죽여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온 우주의 영원한 법입니다. 꼭 간음한 자는 죽이라는 법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래야 이스라엘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고 무너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악습이 공동체 가운데 스며 들어오면, 공동체 전체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꼭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악은 그렇습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간통죄도 폐지된 마당에, 어떻게 죽이기까지 하느냐? 맞습니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죄’라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의 범죄는 상대에게 또 공동체에게 죽을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그 죄값이 ‘죽음’ 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산상수훈 말씀도 함께 기억해야합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니라(마 5:28)”. 주님은 육신의 범죄 이전에 마음의 범죄를 주목하셨습니다. 그것이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범죄는 어떻게 짓게 될까요? 그 시작은 ‘눈’이라 했습니다. 눈의 범죄가 마음의 범죄로, 또 마음의 범죄가 행동의 범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 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 눈을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나쁜 것을 보면 빼 버릴 정도로 단호한 절연의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의 주제는 용서이지만, 우리는 용서 이전에 범죄하지 않는 근원적인 것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자, 질문이 뭐였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했는데 선생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질문 속에는 매우 음흉한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율법대로 죽이라 대답하시면 예수는 별 볼 일 없는, 특별할 것 없는 선생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주님을 향한 존경과 경외심을 폄훼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죽이지 말라 대답하시면, 율법을 깨는 자로 흠을 잡아 종교재판에 넘길 수 있는 심각한 죄인이 됩니다. 그러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아주 잘 이해해야 하는데, 조금 어려운 말로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 두 가지가 서로 부딪히고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뭘까요.

먼저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법입니다. 그 법은 반드시 지킬 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법이 있음으로 우리가 죄를 안 지을 수 있고 죄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고, 그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할 때, 율법의 또 다른 순기능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순기능입니까? 사람이 병들었는데 어디 아픈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려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암에 걸렸는데 그것을 초기에 발견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죄가 죄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이 우리에 주는 너무도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든 것이 있습니다. 뭐가 힘듭니까? 법을 알고 나를 보니, 내 죄가 다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을 보면,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너무도 잘 알게 됩니다. 성경을 더 잘 알면 알수록 그렇습니다.

교역자, 사역자들은 이 말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알게 되면 힘든 게 무엇입니까? 죄책이 옵니다.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큰 죄책이 옵니다. 그 죄책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영혼이 눌림이 옵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새안교회)와 관련된 일을 보던중 마트에 갔는데, 급하게 무엇을 사러 돌아다니다 현금을 얼마 떨어뜨렸습니다. 계산할 때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입니다.

동선을 따라 한참을 찾다가 안되겠다 싶어, 관리자에게 CCTV를 좀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과일 파시던 한 직원이 나가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는 것입니다. CCTV를 보니 그 분인 것입니다. 그대로 나온 것입니다. 현장범입니다. 변명할 수 없습니다. 관리자의 심판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그 마음이 너무 다가와서, 사람이 정말 죄짓고 살면 안되겠구나 이런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지금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게 무엇입니까? 죄책이란 것, 불안과 두려움, 답답함입니다. 그것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율법의 저주’라고 했습니다. ‘저주’라는 것이 굉장히 자극적인 단어입니다. ‘너 저주 받았다’고 하면 뭘 해도 안 되고 늘 실패하고 늘 망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심한 욕 같은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한 말씀인데, 그것이 왜 저주입니까? 죄는 깨닫게 해주는데 그래서 죄책만 잔뜩 갖게 만드는데, 그것을 면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안 보고 살자니 안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인데 어떻게 안보고 우리가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율법을 보고 살자니 자꾸 죄책만 커져 괴롭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것을 한자 말로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독재자(혹은 전제군주)가 마음대로 그 백성들을 압제하는 것처럼, 율법 아래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어 죄책 속에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없는 삶’이란 이런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정죄! 정죄! 정죄! 늘 이 찔림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모두가 서로 정죄하는 세상입니다. 고소하고 고소당하고 찌르고 찔리고, 그러니 다 괴로운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높은 자리에 있으면 뭐합니까?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데.

여러분, 사람이 여리고 착할수록 자학을 많이 합니다. 말씀 공부를 하다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말씀을 들을수록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왜 극단적 선택을 할까요. 죄 많은 자신을 남들이 어떻게 볼지, 밀려오는 정죄감을 감당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자기 죄를 너무 잘 알고 그것 때문에 받을 정죄를 피할 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 나라의 자살률이 아직도 얼마나 높습니까. 대통령이 또 시장이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에게 여전히 예수의 복음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까?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내 죗값을 내가 안 치러도 되는, 나는 그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그 명백한 사실이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얼마나 수준 있게 설명했습니까. 늘 우리가 듣지만 탁월한 설명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노예의 비유, ‘속량(贖良, Redemption)’이라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노예를 값을 치르고 사서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상업적인 단어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의 비유입니다. 속죄양 의식, 속죄일에 백성들이 모여 한복판에 흠 없고 어린 양을 두고 그 위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의 의미는 ‘옮기는 것’입니다. 내 죄를 다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문 밖에 내어 보내면 사나운 짐승에게 물어 뜯겨 피 흘리며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법정의 비유. 칭의(稱義), 영어로 justification 입니다. 이것은 판사가 죄인에게 ‘무죄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판사봉을 ‘꽝! 꽝! 꽝!’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합니까? “당신 죄에 대한 값을 다른 사람이 대신 치뤘으니 당신은 무죄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받아들이는 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이 믿음을 가져서 죄책을 면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짐과 고통을 훌훌 벗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제일 힘든 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입니다. 죄책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이걸로 시달리는 사람 많습니다. 분명히 잘못 믿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 끝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와 함께 좇아오던 애굽의 병사가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애굽의 병사가 나를 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妄想)입니다. 이미 다 죽었는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책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정신병도 그런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자꾸 있다고 생각하고, 혼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어떤 분들은 삶의 열매가 없다고 자학, 죄책에 빠집니다. 분명 자신을 성찰할 일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주님께 연합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날 사랑하지 않으시는 건 아닙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죄인이었던 나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박국 3장 예언처럼, 우리가 아무 열매 없어도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우린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이미 엄청난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2장 속 구원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자학하는 사람들, 죄책 가진 사람들이 다 떨쳐버리길 바랍니다. 그것은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주된 무기입니다. 예수 피의 능력으로 마성적인 힘들을 다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요 8:5-6)”.

정말 긴장된 순간입니다. 돌로 치라 할 수도 없고 치지 말라 할 수도 없는…,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시나요.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6-8)”.

이것이 무슨 장면입니까? 율법은 어디에 쓰여져 있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돌판에 십계명을 받아서 왔습니다. 율법은 돌에 새겨진 법입니다. ‘돌에 새겨졌다’는 것은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법은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땅에 쓰신 것은 “돌에 새겨진 그런 법만 있느냐? 내가 다른 법을 쓰노라. 땅 위에 이 우주 위에 쓰인 새 법이 있노라”는 의미입니다. 그 새 법이 무엇입니까. 율 법외의 또 다른 법 말입니다.

또 로마서 들어갑니다.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그것이 무엇입니까? ‘용서’라는 법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땅에 ‘용서’라는 글자를 쓰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죄인을 함부로 죄없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의 죄값을 내가 치름으로, 그가 받을 심판을 내가 받음으로. “자기도 의로우시며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그런데 여기 주목해야 할 말은 또 무엇입니까? 돌을 들고 여인을 치려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절묘한 말씀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9절에서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자격이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문제가 있는데 너 문제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황금률에 “너희 중에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자는 대법원에 끌려갈 것이며(마 5:22)”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정죄하는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죄책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무거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날 정죄할 줄 알았는데. 10절에 너를 정죄할 자가 어디 있느냐? 없다고 합니다. 한 분밖에. 죄 없으신 한 분, 주님밖에 없습니다. 여인 앞에 서 계신 주님. 그런데 그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시니라(요 8:11)”.

우리 영혼에 진정한 쉼과 자유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언제 주신 것입니까? 십자가 사건 이전의 이야기입니까, 이후의 이야기입니까?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그 의로운 피로 거룩한 제물이 되시고 단번에 우리를 구원하신 보혈의 십자가 그 사건 이후, 우리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더더욱 죄사함의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할 우리가 아닙니까!

내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게 하기 위해 그 붉은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가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학을 하고 괴로워 한다면 그 피가 헛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 없지 않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의 음성이 또 들립니다.

여러분, 이 속죄의 가르침 속에는 자학을 이기는 큰 지혜가 있습니다. 사단은 늘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 못났잖아. 너 말씀대로 못살잖아. 그렇게 오래 듣고도 심지어 가르치기까지도 하면서도 그대로 못살잖아? 그러면서 뻔뻔하게 교회 나오냐?’ 이렇게 끊임없이 찌릅니다.

그런 공격이 들어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그렇다. 맞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난 말씀을 알고도 못산다’고.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인간이다’. 이 순간 사단이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린 반격해야 합니다. 내 모든 약함과 부족함 내 모든 죄를 대신 지지고 죽으신 하나님 아들의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의 능력입니다.

보혈의 능력,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왜? 그 은혜가 한량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이 너무도 넘치는 사랑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하나님 사랑이 부은 바 된다는 것입니다. 일대일로 주시는 깍쟁이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죄보다 크신 하나님.

어느 찬양집회 현수막에 이런 것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온 우주만물을 아담 하나를 위해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우리 모든 죄악을 단번에 도말하시고. ‘도말(塗抹)’은 아주 더러운 벽을 새하얗게 페인트 칠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흔적을 완전히 싹- 없애주는 것입니다. 교정사역, 교도소에서 복음 전하는 분의 간증을 듣는데. 흉악범들이 예수 믿고 성령 받았더니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평생 지은 온갖 끔찍한 죄악들도 주님이 다 도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죄수들 안에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감격이 너무도 큰 것입니다. 그래서 옥중에서 복음을 전하고 형장에서도 너무도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우리에게서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시고 우리 모든 죄악된 모습까지도 능히 눈보다 더 희게 하실 수 있는 분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이런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로마서 8장은 성령으로 사는 새 삶에 대해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 말씀도 함께 우리 마음으로 받고, 우리 모두가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자유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전하며 사는 새안교회 및 모든 성도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장시환 목사(서울 길음동 새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