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는 완벽하게 처리될 수 있다’는데 의구심을 갖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를 처리해 주셨고, 이미 ‘그의 기억에서 그들의 죄와 불법을 지우셨다(히 10:17)’는 말씀을 자주 들으면서도, 그런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죄를 수백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핵 폐기물처럼 여기는 듯 하며, 그 결과 늘상 자신들의 죄 짐 아래 신음하며 죄의식에 절어 있다.

◈죄가 처리되는 방식

죄는 ‘빚(debt)을 청산’하듯 청산된다. 빚을 청산하면 빚이 없어지듯, ‘죄의 빚’도 청산되면 없어지게 된다. 성경이 ‘죄의 처리’를 ‘갚을 치른다(a ransom)’는 ‘구속(救贖, 시 49:8)’, ‘대속물(代贖物, 마 2:28)’,‘속전(贖錢, 딤전 2:6)’ 같은 용어와 동의어로 쓰는 것도 ‘죄의 청산이 빚 갚듯 된다’는 뜻이다.

성경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탕감(마 18:23-27)’ 이야기도 ‘죄의 처리’를 ‘빚을 탕감(蕩減)받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은 1만 달란트만큼 큰 액수이며, 그것은 우리의 상환(償還)한계를 넘어선 것이기에, 하나님이 그냥 탕감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빚’은 ‘당사자’가 갚든 ‘보증인’이 갚든 갚기만 하면 청산되듯, ‘죄의 빚’역시 본인이 아닌 보증인이 갚아도 청산된다. 효력은 둘 다 같다. 그리스도는 보증인으로서,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죄 빚’을 다 갚아주셨다(시 69:4).

‘죄의 빚의 완전한 처리’에 대한 비유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빚 문서(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골 2:14)’고 표현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받아 빚문서(율법)가 지워진 자는 더 이상 ‘빚쟁이(죄인)’가 아니다.

‘백성의 죄’를 지고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 염소(a scapegoat, 보냄받은 염소, 레 16:10)’도 ‘죄의 완벽한 처리’를 상징한다.

‘아사셀 염소(a scapegoat)’가 광야로 보내지면 다신 돌아오지 않듯(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든지, 맹수에게 찢겨죽든지), ‘아사셀 염소’처럼 우리의 죄를 지고 성문 밖으로(광야로) 가신 ‘그리스도(히 13:12)’와 그에게 지워진 ‘우리 죄’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 죄를 지신 그리스도가 내 죄와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우리 죄의 완벽한 처리’를 확증한다. 곧 ‘죄인’으로 죽으시고 ‘의인’으로 다시 사심을 통해서다.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 ‘죽으실 때의 그’는 죄사함 받기 전의 우리와 동일시되고, ‘부활하실 때의 그’는 죄사함 받아 의인된 우리와 동일시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죽으셨을 때의 그리스도가 아니듯(오해 없길 바란다. 근원적으로 달라졌다는 말이 아닌, 사역상 신분의 다름을 말한 것이다), 죄에서 구속받은 우리는 구속받기 이전의 우리가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구속받은 성도의 완전함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성경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고 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죄의 완벽한 처리’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많다. ‘죄를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 깨끗하게 없앤다’는 ‘죄의 도말(blot out all mine iniquities, 시 51:1, 9; 사 44:22)’이 그것이다.

마가는 이 ‘도말의 완전함’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진(막 9:3)”것으로 묘사했다.

또 ‘죄의 완벽한 처리’를 ‘죄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도 묘사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옮겨주시고(시 103:12)’, ‘깊은 바다에 수장시켜 주심(미 7:19)’으로 우리의 죄를 다시 직면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들의 죄를 놓아주지 못하고, 매일 그것들을 대면하며 죄의식과 자책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왜 예수님이신가?

구약의 ‘속죄 제물’ 규례는 인간이 자기의 죄를 자기가 처리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인간이 자기 죄를 처리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짐승을 ‘속죄 제물’로 삼게 하질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속죄 제물’은 하나의 그림자요 예표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실체는 창세 전부터 언약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시다(계 13:8).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제물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하시기로 지정됐다. 그가 바로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나신(사 7:14)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예수 그리스도시다(계 5:5)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짐승의 피’를 통한 ‘죄의 구속’은 믿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짐승 제물’이 자신들의 죄를 속한다고 믿었기에, ‘짐승’을 잡아 바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진노하셨으며, 더 이상 그런 무의미한 제물들을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했다(사 1:11).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은 근본, 자력으로는 죄값을 지불할 수가 없는 ‘죄인의 무능성’ 때문이지만, 다른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이 ‘대표성 원리’이다.

곧 ‘죄’가 인류 개인에게서가 아닌 ‘인류의 대표(아담)’로부터 ‘유전’됐으니, ‘죄의 구속’ 역시 개인의 역량으로서가 아닌 ‘새로운 인류의 대표(그리스도)’로부터 ‘전가(轉嫁)’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롬 5:19).

여기엔 ‘원죄(original sin)’와 ‘자범죄(actual sin)’를 불문한다. 그리고 이는 둘의 ‘불가분리성’에 기인한다. 비유컨대 ‘원죄’가 뿌리라면, ‘자범죄’는 그것의 열매이다. ‘나무(뿌리)와 열매는 일체이다(눅 6:44)’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상통한다.

혹자는 ‘원죄’는 아담에게로 돌려야 하지만, ‘자범죄’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둘을 분리시킨다. 이단적 가르침이다. ‘자범죄’의 뿌리인 ‘아담의 원죄’가 없었다면 ‘자범죄’도 없었기에, ‘원죄’만 아담에게로 돌리고 ‘자범죄’는 내 소관에 둘 수 없다.

성경은 때론 ‘그리스도의 대속’을 ‘아담의 원죄’에 한정지우기도 하고(히 9:15), 때론 ‘자범죄’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다음 구절은 후자에 해당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받은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은 다만 ‘현재의 망령된 행실’을 있게 한 ‘원죄’만을 지칭하지 않고, 원죄와 자범죄의 분리 없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조상 아담으로부터 현재 내게로 이어져 내려온 망령된 행실’을 의미한다.

◈왜 믿음인가?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이 말씀은 ‘믿음’ 자체에 무슨 마력이 있어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이룬 ‘죄의 구속’을 ‘믿음’으로 전가(轉嫁)받는다는 뜻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피로 이룬 ‘죄의 구속’을 전가 받는 방편이다.

온 인류의 ‘죄인 됨’이 개개인이 죄된 행위 때문이 아니듯, ‘죄의 구속’역시 개개인의 특별한 행위로서가 아닌 믿음으로 받게 하셨다. ‘원죄’는 아무 ‘조건 없이’ 전가 받았으면서, ‘죄의 구속’은 ‘행위’로서 받는다면, 둘의 대칭구도가 깨어진다.

또한 ‘믿음’은 택자로 하여금 ‘인류의 새로운 대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그의 ‘구속’에 참여하게 만든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 11:23)”.

이는 그에 앞서, 그들이 ‘인류의 첫 대표 아담’에게 속하여 ‘죄인’이 됐던 것과 같은 이치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그리스도가 내 죄의 구속자’임을 고백하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택자가 ‘믿음’으로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을 환영하므로 그의 희생이 빛을 발하게 되며, 아들을 내어주신 ‘성부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자기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죄의 구속’을 경륜하신 하나님의 지혜여, 찬양을 받을지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