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서머셋 몸 | 송무 역 | 민음사 | 328쪽 | 9,000원

프랜차이즈 공격에, 무너지는 동네빵집?
‘내 것’만 분명하면 인정받고 살아남는다
남들만 따라하는 모습, 아름다울 수 없어

달과 6펜스
‘내 것’이 분명해야 인정받는다. 파란색 지붕, 파란 간판. 골목마다 프렌차이즈 빵집이 생겨나고, 동네 빵집이 밀려난다. 프랜차이즈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는 동네빵집. 사장님 노하우가 본사 레시피에 밀렸다.

그래도 살아남은 집이 있다. 튀김 소보로로 유명한 성심당, 옥수수빵의 삼송빵집, 야채빵의 이성당. 내 것이 분명하니, 프렌차이즈 물량공세를 물리치고 살아남았다. 아니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나의 길이 분명한 사람은 외부의 어떤 도전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움 역시 내 속에 있다. 헤엄치는 물고기도 그 아름다움을 보고 멈춰버린다는 여인 서시(西施). 서시는 가끔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렸다. 가슴앓이 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미인이던 서시는 찡그리는 모습조차 예뻤다. 이 모습을 본 여인들은 틈만 나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렸다. 찡그리는 얼굴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국 남자들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었다.

서시를 따라하느라 내가 가진 아름다움도 놓쳐 버렸다. 서시가 눈을 찡그리자 다른 여인들도 따라 했다는 뜻의 서시빈목(西施顰目). 내 것을 놓치고 남들만 따라하는 모습이 아름다울 수 없다.

<달과 6펜스>, 자신의 길 걸어간 화가 이야기
증권 중개인 주인공, 사십에 그림 꿈 찾아 떠나
자신만의 그림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다시 시작

윌리엄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펜스>는 자신의 길을 걸어간 화가의 이야기다.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찰스 스트릭랜드’, 그는 마흔의 나이에 훌쩍 파리로 떠난다.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파리로 떠났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그를 다시 런던으로 데려 가려고 찾아간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아니 나이가 사십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림을 그려본 적은 있나요?”
“일 년 전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소.”

지금 시작해서는 화가로 성공할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스트릭랜드는 화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림이 그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림에 재능이 있을까?’ ‘마흔에 그림을 그려서 성공할 수 있을까?’ 스트릭랜드에게는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리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감 살 돈이 떨어지면 잠시 일거리를 구해서 일을 하고, 캔버스와 물감 살 돈만 모이면 다시 그림을 그릴 뿐이다. 때로는 먹을 것도 없었고, 겨울에 난로에 불을 땔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림을 그렸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스트릭랜드. 당연히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알아봐줄 리 없다.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한 점도 팔리지 않는다. 아니 팔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태평양 섬 타히티에서 자연 그리는 주인공
어느 날 나병 걸려… 원주민들도 발길 끊어
마지막 삶 불태운 작품, 죽음과 함께 사라져

이후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에서 잠시 지내던 그는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간다. 그곳에서 자연을 그리고 타히티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다 타히티 원주민인 열일곱 살 ‘아타’를 만나 살게 된다.

둘은 도로에서 8km나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 그나마 열대나무로 우거진 샛길을 지나야만 들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스트릭랜드는 그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자연을 보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병에 걸린다. 평소에도 고립된 생활을 하던 두 부부는 이제 완전히 그들만 남게 된다. 그나마 교류하던 원주민들이 완전히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래도 아타만큼은 끝까지 스트릭랜드와 함께 한다.

나병이 점점 심해져서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스트릭랜드는 집 안에 있는 벽에다 타히티 섬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온 집안 벽이 또 하나의 신비한 타히티 섬이 되어갈 무렵, 그는 시력마저 잃는다.

그래도 끝까지 그림을 완성한 스트릭랜드는 아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달라고 말한다.

자신이 죽거든 집에 불을 지른 다음 모조리 타는 것을 지켜봐 달라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삶을 불태워 그린 작품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그가 죽고 4년이 지난 후에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뒤늦게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혹시나 그가 남긴 그림을 찾으러 다녔다.

분명한 것은 스트릭랜드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것이 스트릭랜드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림이 좋아서 그렸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에 만족했다.

달과 6펜스
▲폴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90)’.
실제 화가 폴 고갱 모델로 한 소설
괴짜같은 모습, 처음엔 불편하지만
‘자기 자신’으로만 살아가, 부러워


이 소설은 실제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물론 폴 고갱의 삶과 스트릭랜드의 삶이 완전 일치하지는 않는다.

폴 고갱은 증권 회사 일을 하던 20대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35세가 되던 해 증권 시장의 붕괴로 전업 화가가 되었다.

스트릭랜드의 삶은 조금 더 소설다운 극적인 요소가 있다. 마흔의 나이에 일상을 등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부터가 평범하지 않다. 소설 속에 등장한 스트릭랜드는 주변 상황에 철저히 무감각하다.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굶어 죽어가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도와준 사람의 화실과, 집, 심지어 아내까지 차지해 버린다. (스트릭랜드가 독감에 걸려 사경을 헤메는 동안 간호해주던 여인이 그에게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철저히 외부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그림만 그린다.

타히티 오지에서 문둥병에 걸려 사람들이 떠날 때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아타’에게조차 자신을 떠나도 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그림에만 미친 사람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런 괴팍하고 괴짜같은 모습이 처음에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를 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만 살아가는 스트릭랜드.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이 든다.

중년 남성 최애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
홀로 있고 싶다? 나로 있고 싶을 뿐이다
성적순 진로, 적성(適性) 아닌 적성(適成)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가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한다. 세상과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왜 중년 남성들은 고립에 열광할까? 홀로 있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로 있고 싶을 뿐이다. 누구의 아빠와 누구의 남편. 회사의 직급이 아니라 ‘나’로 있고 싶다.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정신의학박사 정혜신은 이렇게 해서 찾아오는 병이 ‘공황장애’라고 말한다. ‘나’로 살지 못한 병이다.

대한민국은 ‘나’로 사는 법을 배우기 힘든 나라다. 성적이 적성을 이기는 나라. 진학상담을 할 때 처음 받는 질문이 적성이 아니라 성적이다. ‘무엇을 하고 싶으니?’라는 질문보다 ‘이 성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는다.

적성(適性)에 따라 전공을 선택하기보다 적당한 성적(成績)에 따라 전공을 선택한다. 적성(適性)이 아니라 적성(適成)이다.

성적도 점수를 보기보다 등수를 본다. ‘몇 점’인가보다 ‘몇 등’인지가 중요하다. 내 실력보다 내 앞에 몇 명이 있는지 중요하다.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상품 마냥 걸려있는 직업들. 남들보다 빨리 달려 1등급이 되면 강요받는 직업, 2등급이 되면 선택할 수 있는 직업. ‘내 적성’에 맞는 길은 사라지고 성적을 따라 세상이 요구하는 길만 남았다. ‘나’로 살기 힘든 나라다.

6펜스 뒤로 하고 달 쫓으면 시선 곱지 않아
스무 살 되어도 꿈을 찾는 게 꿈이 된 시대
진정한 행복은 ‘나’를 발견하는 데서 온다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에서 ‘6펜스’는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던 은화다. 꿈을 의미하는 ‘달’과 물질적 가치를 나타내는 ‘6펜스’. ‘달’과 ‘6펜스’는 둘 다 둥글지만,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돈이라는 ‘6펜스’를 뒤로 하고 꿈이라는 달을 쫓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대신 ‘6펜스’를 쫒는 삶이 꿈을 향해 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돈이 되는 삶을 향해 달려라. 그것이 멋진 꿈이다. 그러다 보니 가슴 속에 ‘달’은 사라지고 주머니 속에 ‘6펜스’만 남았다.

고려대학교 정문에 대자보를 붙이고 자퇴한 김예슬 청년. 소위 ‘김예슬 선언’이라 불리는 그 대자보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6펜스만 강요하는 사회는 달을 보는 것조차 금지했다.

행복은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아타’는 사랑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길은 하나님 앞에 설 때다. 성경에서 그렇게 유명한 다윗도,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는 단지 ‘막내’로 불렸다. 사무엘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줄 때부터 ‘다윗’이라고 불렸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것이다.

수많은 목동 중에 하나, 일곱 형제 중에 막내. 남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던 소년이 하나님 앞에 서자 ‘다윗’이 되었다. 왕이 되었다.

세상은 돈을 쓰면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가치’있게 써야 할 돈을 ‘사치’로 낭비한다.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한다.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님 앞에선 삭개오는 ‘수치’스럽던 과거를 버리고, ‘가치’있는 삶을 선택한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진짜 나를 발견한다. ‘6펜스’의 삶을 등지고 소명의 달을 향해 걷는, 나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된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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