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부활절’ 언급서 감지 가능한 ‘두 가지’
이 시국에 ‘극성스럽게’ 예배드리냐는 기독교인들
정권 수뇌부, 예배에 반감 표출해도 문제 못느껴
‘예배 정상화 노력 폄훼’ 교회 내부 목소리에 우려

온라인 예배, 공예배 대체하기 위한 한 가지 조건
교회 혹은 개인이 불가항력적 상황인지 분별해야

문재인 사회주의 부활절
▲성금요일이던 지난 4월 10일 SNS를 통해 전달된 문재인 대통령의 코로나 관련 메시지. 코로나 확산의 주요 불안요소로 부활절 예배와 총선을 지목하고 있다.
◈신앙의 진정성: 한국의 비기독교적 문화배경 속 예배 제재 시도

이틀 전인 금요일, 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코로나19 상황과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기서 그는 ‘부활절과 총선’을 통한 코로나 대량확산을 조심하자고 당부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지, 특히 한 나라의 정부 지도자쯤 되는 인물의 메시지는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담은 비중이 크다. 소위 ‘워딩(wording)’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워딩’에서 감지할 수 있는 바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총선보다 부활절을 앞서 언급함으로써 코로나 확산의 불안감과 교회 예배를 우선적으로 연결지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물론 시간적 순서로 볼 때 부활절이 총선에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수사법적으로 볼 때 문장이나 문구 첫머리에 글쓴이가 의도하는 핵심을 내세우는 방식은 모든 수사법의 첫째 되는 원리이다.

둘째, 부활절과 총선을 ‘~와(and)’ 표현으로 대등하게 엮어 놓음으로써, 각각의 행사로 인해 유발되는 코로나 확산 가능성을 비등한 수준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치상 이는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중대형교회들 대다수는 정부가 교회에 대한 행정명령과 제재 위협을 가하기 이전부터 온라인 예배나 분산 예배, 소모임 예배 등으로 대예배를 대체하고 있었고, 미자립 소형교회들 또한 상당수가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거나 방역 지침을 지켜가며 소규모 예배를 이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즉 현재 교회 측에서 예배 때문에 모이는 인원은 참정권을 지닌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총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으로 유독 교회를 걸고 넘어지는 현 정권의 행태와 그에 대한 일반의 반응을 지켜보며 확인되는 점 역시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전편의 논평에서 자세하게 밝힌대로, 현 정권 지도부가 다분히 사회주의적 노선을 지향하고 그에 따라서 반종교적인 정치성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는 교회 내부를 포함해서 한국 사회 전반이 기독교 신앙과 문화에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은, 복음의 생활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에 교회와 신앙인들은 교회에 대한 정치권의 부당한 행사들을 경계해야 하지만, 교회 내부 신자들의 신앙의 진정성을 돌아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함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한국의 전통 민속문화는 다분히 현세중심적이고 친(親)중국적이면서 폐쇄적이다. 기독교 선교가 100년 넘게 진행됐고 1,000만 가까운 기독교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내세지향적이고 초월지향적인 가치를 낯설게 여기는 문화적 배경 때문에 진정성 있는 복음의 생활화는 더딘 편이다.

이런 현실은 특히 요즘처럼 전국적인 위기가 발생한 상황에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교 문화
▲현세적 가치와 집단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 ⓒsteemit.com
무엇보다 친중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정권 수뇌부가 지속적으로 개신교 예배에 편향적인 반감을 표출하고 있는 데 대해 별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교회 외부의 사람들이 이런 행태에 동조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 한국 사회의 근본 정서 자체가 기독교의 복음적 가치들을 낯설어할 뿐더러 동양적이지 않은 것, 중국적이지 않은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내린 서구와 미국에서는 특정한 상황을 친숙하게 설명하려 할 때, 성경의 구절이나 고유명사 등을 언급하는 인유법(allusion)을 사용한다. 이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가 그 사람의 교육적, 언어적 소양을 드러낸다.

반면 한국에서는 성경 구절을 사용하면 광신도 취급을 받지만 중국 고사성어나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이 담긴 문구를 사용하면 교양 있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각각 2,000년 가까이 상이한 문화적 배경 하에 놓여있던 터라 자연스러운 결과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단지 언어 사용뿐 아니라 신앙을 갖고 복음을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문제시된다.

일전의 논평을 통해 누차 지적해 온 것처럼, 중국식의 유교적 집단주의 사회 질서에 깊게 물든 한국인들은 관부(官府)의 조처에 불응하고 집단의 정서에 위배되는 나오는 돌출행위를 적대시한다.

특히 이런 돌출행위가 현세적 가치(부귀영화)에 위배되거나 부합하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적대감은 배가된다. 한국을 비롯, 동아시아 국가들의 창의성 없는 국민성은 바로 이 같은 습성에서 나온다.

그래서 일반적인 한국인의 눈으로 볼 때, 현재 어떻게든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리려 하는 교회들의 노력은 기본적으로 허황된 가치(보이지 않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추구하느라 관의 조처에 불응하는 돌출행위로 규정된다.

일반 대중의 이와 같은 반응은 충분히 이해되는 면이 있다. 애초 삶의 정황 자체가 다른 바에 낯선 가치에 대한 소원함과 반감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온라인 예배 방역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입구에 부착된 온라인 예배 안내문. ⓒ이데일리 캡처
다만 문제는 사회주의적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집권자들이 한국의 이 뿌리깊은 전통문화적 배경을 악용하면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인 종교의 자유마저 침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2018년 1월 민주당이 제출한 개헌안 초안에서는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구절을 ‘민주적 기본질서’로 교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동년 5월에는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교체하겠다는 교육부의 발표가 있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이러한 시도의 의도는 명백하다. 시민 개개인의 인권, 자유, 다양성을 우선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실체적 집단으로 규정하고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중심의 대중주의(populism)를 추구해 가겠다는 현 정권 지도부의 포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문화적으로는 전체주의 혹은 집단주의를, 경제적으로는 평등과 분배 위주의 사회주의를 표방하겠다는 이런 시도가 다수의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은 이유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배경 자체가 기본적으로 전근대적이고 집단에 종속적인 성향을 갖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문화적 정서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을 받아들임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실 하나만을 믿는 것이 아닐텐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단편적 지식 하나만으로 구원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오해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소규모로라도 예배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폄훼하는 목소리가 교회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입증한다.

온라인 예배라는 선택지가 있는데 굳이 집권자, 관부, 그리고 대중의 정서를 어겨가며 ‘극성스럽게’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는 성토의 목소리는 사회주의적이고 반종교적인 정서가 교회 내부에서조차 호응을 얻고 있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특히 대다수 교회들이 이미 온라인 예배라는 선택지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일부 교회를 문제시하는 태도는 현실적인 차원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한국의 전근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문화 전통에 매몰되어 스스로에게 주어진 종교의 자유를 내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 이외의 각종 비필수 업종의 영업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집단확진 우려는 고의적으로 간과하면서, 유독 교회에만 근거가 희박한 경고와 우려를 지속하는 현 정권의 편향적 태도에 대해, 교회 내 신자들마저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신앙의 공간성: 사회적 책임과 신앙의 양심을 조화시키는 예배

지난주 수요일(4월 8일) 강남의 한 유흥업소 여종업원이 확진자로 확인되고, 해당 확진자가 유흥주점 고객 118명과 접촉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 시내 422개 유흥업소(클럽, 룸살롱, 콜라텍 등)에 집합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는 뒤늦게나마 적절한 조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사태는 문재인 대통령, 정세균 총리,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네 사람이 돌아가며 교회 예배를 코로나 집단 확산의 잠정적 주 원인으로 지목해 경고했던 것과는 판이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클럽이 막히자 대안으로 헌팅포차를 선택하는 젋은이들의 몰상식하고 무책임한 행태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아직까지 아무런 제재나 경고도 가해지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깊게 우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SNS에서 ‘부활절과 총선’이라는 워딩을 채택한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유흥업소 단속 헌팅포차
▲클럽이 닫히자 헌팅포차로 몰리는 젊은이들. ⓒ중앙일보 캡처
그렇다면 현 사태에 대해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대비해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현 상황이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리기 어려운 위기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특히 수백에서 수천 명이 밀착해서 군집하는 공예배는 분명 대량 집단확진의 우려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대형 교회들 대다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일단 온라인 예배라는 대안을 채택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공예배를 온전하게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온라인 예배의 문제는 신앙의 공간성(spatiality)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공간성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적 사유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인간의 실존적 공간성을 ‘방향잡음’과 ‘거리없앰’의 ‘염려 행위’로 규정한다.

미술관에서 전시된 명화(名畵)를 감명 깊게 감상하는 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면, 방향잡음과 거리없앰의 공간성 개념이 쉽게 이해된다.

이 사람은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실제 공간적으로 본다면 안경이 그림보다 이 사람의 눈에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현재 이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그림에 붙잡혀 있다.

이 사람의 ‘몸의 시선’은 안경을 향해 안경과 가장 가깝게 마주하고 있지만, ‘마음의 시선’은 그림으로 ‘방향잡혀’ 있고 그림과의 ‘물리적 거리를 없애고’ 있다. 그의 마음은 그림에 사로잡혀, 안경이 아닌 그림과 가장 가깝게 밀착되고 있는 것이다.

명화 감상 시각 공간성
▲명화를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상태는 실존적 공간성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이다. ⓒNYT 캡처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의 순간 전체가 무엇인가에 전면적으로 마음을 쏟고 있는 상황을, 성경에서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는 가르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온라인 예배를 통해 공예배가 대체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모니터를 통해 예배 실황을 보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실제 공예배에서와 같이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차라리 실제 공예배에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은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실제로 방송이나 온라인 예배 실황을 통해 예배에 직접 참석한 것과 같은 감화와 체험을 한 신자들의 간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방송이나 온라인 설교를 통해 믿음을 갖게 돼 기독교인이 된 이들, 혹은 심지어 병상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이 방송이나 온라인 설교를 듣고 기도응답을 받아 병이 낫거나 호전된 사례에 대한 간증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믿고 순종하려는 관점으로 볼 때, 온라인 예배가 공예배를 대체할 수 있으려면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바로 각 교회 혹은 개인이 신앙의 양심상 몸소 공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 스스로 분별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그리스도의 약속, 그리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라는 사도들의 권고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할 수 있는 백신도 개발되지 않은데다 무증상 전파 감염 가능성도 높은 상황에서, 수백에서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공예배를 드리기는 어렵다. 이는 교회와 신자들 입장에서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다.

이에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은 이미 정부 권고에 따라 선제적으로 대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한 상황이다.

온라인 가정 예배
▲코로나 사태로 가정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가족의 모습. ⓒ서울신문 캡처
그렇지만 소규모 모임이나 예배가 가능한 교회들은 정부 지침에 따른 철저한 방역 노력을 갖추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예배를 가능한 한 정상적으로 드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 자체를 폄훼하는 것, 그것도 기독교인이 스스로 이런 노력마저 지탄하고 폐기하려는 것은 신앙의 양심상 불가능한 일이며, 스스로가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믿는 복음적 기독교인인지 의심하고 돌아봐야 할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자유민주적인 관점에서, 즉 각각의 신앙의 양심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와 현세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는 해외와 국내 언론의 보도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AP News 등 미국의 대형 주류 언론들은 부활주일을 앞두고 온라인 예배로 태세를 전환한 각국 교회들의 상황을 1면 뉴스로 보도하고 있다. 이들 언론들은 텅 빈 예배당을 보여주며 세계 각국의 교회들이 코로나 방역을 위해 기독교 최대 절기 중 하나인 부활절 공예배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국내 언론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SNS에 ‘부활절’이 언급된 것을 집중 보도하는 한편, 부활절을 앞두고 미국 곳곳에서 ‘예배 금지 vs 강행’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집중 보도(연합뉴스)하고 있다.

동일한 현실을 두고서 한편에서는 대다수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대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며 방역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일부 교회들이 예배 금지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강조해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주 화요일(4월 7일) 캔사스 주의 로라 켈리 주지사가 10인 이상이 모이는 교회 예배 금지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에 공화당 소속의 캔사스 주의회 의원 7인이 입법위원회를 소집해 주지사의 행정명령을 무효화했다. 켈리 주지사는 이것이 순전히 정치적 계산에 의한 위헌적 행위라며 캔사스주 대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미국 캔사스 주지사 예배 금지
▲10인 이상이 모이는 예배 금지를 발표한 로라 켈리 캔사스 주지사. ⓒThe Kansas CIty Star 캡처
이에 대해 공화당 소속 캔사스 하원의장 론 리크먼은 켈리 주지사가 내린 행정명령의 취지에는 공감하며 교회들이 부활절 예배를 최대한 온라인 예배로 대체해 주기를 원하나, 그 결정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맡겨야 하며 위헌적으로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사태에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켈리 주지사가 아직까지 주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비필수 업종인 요식업체들에 대해 영업중지를 요구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켈리 주지사는 식당 내 취식(dine-in service)를 중단하고 테이크아웃과 배달만 허용하는 행정명령을 고려한 적 있다고 밝힌 바 있으나, 아직 이를 실행하지는 않고 있다.

결국 현재 캔사스 주의회에 일어난 분쟁 역시 정책적 형평성을 잃어버린 교회에 대한 행정편의적 제재가 문제의 핵심이지, 교회들의 정책불응이 핵심이 아닌 것이다.

이 사태를 마치 교회들의 정책불응 때문에 일어난 사태처럼 포장하는 국내 일부 주요 언론의 태도는 공공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공정성을 고의적으로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대책 없이 예배를 강행하려 하는 미국 내 일부 중대형 교회들에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2주 전 마이애미 주 탬파에서 구속되었던 로드니 하워드-브라운 목사나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에서 체포된 토니 스펠 목사 등 미국 일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방역을 위한 통제가 어려운 수백명 규모의 부활절 대예배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스펠 목사 교회의 경우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 예배를 진행해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하워드-브라운 목사와 스펠 목사 모두 믿음이 코로나 확진을 방지한다는 확신 하에 대담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방역을 위한 적절한 노력 없이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분명 코로나19 대량 확산을 불러일으킬 위험을 안고 있으며 이는 중대형 교회들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루이지애나 주 사회적 거리두기 토니 스펠 목사
▲루이지애나 주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어겨 체포된 토니 스펠 목사. ⓒNBC 캡처
그러나 미국의 극소수 중대형 교회의 사례를, 그것도 방역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막무가내식의 예배 강행 사례를 들어 국내 교회들도 예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것은 부조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미 대부분의 대규모 예배는 온라인 예배로 대체되고 일부 소규모 교회들만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한국교회의 상황에는 이와 같은 억지 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

결국 현 정권 수뇌부와 언론이 방역 지침을 거의 대부분 선제적으로 지켜 온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를 코로나 확산의 주된 불안요소로 지목하는 행태는 사상적으로든 정책적으로든 지극히 부조리할 뿐더러, 객관성과 형평성을 잃어버린 처사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현실에 맞지도 않는 미국의 극소수 논란거리를 가져와 교회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반종교적 적대감을 조장하려 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는 후안무치한 여론조작이나 다름이 없다.

한국교회 전반은 방역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지키면서 각자 신앙의 양심에 따라 지혜롭게 예배 제재 시도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시설 여건이 되는 교회들은 ‘드라이브 인 예배’도 시행하면서 대안을 강구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공예배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양심을 버리지 않으면서 방역에 성공하는 방안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교회들이 현재 여기저기서 확진자를 쏟아내는 비필수 업종 사업장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모범적 방역을 수행하고 있는 만큼, 예배 정상화 시도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행태들이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무근거한 것임을 우리 신자들이 확실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