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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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사기 7장 1-8절


세상은 최고를 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욕망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동일합니다.

왜 사람들은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세상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실적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등수로 평가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을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최고가 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고보다 최선을 원하신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을 했습니다.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을 하고 난 이후, 곧바로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두 팀은 분위기가 완전 달랐습니다. 독일 팀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2등을 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도 있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 가운데는 어디에도 웃음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전문가들의 평가는 아르헨티나의 전력으로 보았을 때 8강까지 가는 것도 힘들 것이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이 예상을 깨고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8강을 넘어 결승전까지 갔습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너무나 잘 해주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물론 경기 중에 아쉬운 점들이 있는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국민들 가운데는 2등이라는 등수 때문에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적과 등수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람이 되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맡겨주신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역량을 가지고 있는 가하면 어떤 사람은 작은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작은 역량을 가진 사람이 큰 역량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와의 경주는 누가 봐도 토끼가 이기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거북이가 이깁니다. 사람들은 거북이가 이긴 것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거북이의 최선에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최고인 거북이에게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거북이의 최선에 환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겨주신 달란트가 분명히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5달란트를 어떤 사람은 2달란트를 어떤 사람은 1달란트를 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면서 누가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소유했느냐에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많이 가진 자가 최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몇 달란트가 되었던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느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최고보다 최선을 선택하라

하나님께서는 맡겨주신 달란트에 최선을 다했을 때,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드시면서 최고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최고보다 최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사람들 만나면 고개를 숙이지만 최선의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숙입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지만, 최선의 사람들은 감동의 대상됩니다.

그렇기에 최고의 사람들은 쉽게 단명하지만 최선의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자신도 행복할 뿐 아니라 남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곧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세워지다

사사 시대의 역사는 반복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십니다. 괴롭힘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인 사사기의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한 번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디안 족속을 사용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을 고통을 주십니다. 이 고통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며 기도했을 때, 기드온이라는 사사를 세우십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사로 세움을 받은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이스라엘족속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3만 2천명이었습니다. 3만 2천명이라는 숫자는 굉장히 많은 숫자인 것 같지만,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숫자입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연합군을 만들어서 왔는데, 그 숫자가 해변의 모래와 같다고 성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 숫자를 헤아릴 수 있습니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만큼 숫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숫자에 비하면 3만 2천명은 새발의 피밖에 되지 않습니다.

당황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 숫자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군사를 데리고 전쟁을 이기면 스스로 싸워서 이겼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드온에게 한 가지를 지시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드온은 3만 2천명 앞에서 괜찮으니까, 솔직히 전쟁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3만 2천명 중에서 무려 2만 2천명이 돌아갑니다. 이제 1만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직도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개처럼 물을 혀로 핥아 먹는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를 구분 하라고 하십니다.

300명의 용사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침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인 백성들에게 지시했을 때, 손에 물을 담아 혀로 먹는 백성은 30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을 가지고 미디안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께 이 300명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군대과 전쟁을 하기 위해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언제 미디안 군대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물을 먹는 것도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주변을 경계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300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경계심도 없어 목을 축이는 데만 바빴습니다.

300명은 군인으로 경계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이 300명의 사람들을 통하여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300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것이 사랑하는 길임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교회 차가 시동을 걸리지 않아서 불편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중고등부에서 팔공산으로 단합대회를 가는데, 교회차가 시동이 걸리지가 않았습니다.

어제만 해도 시동이 잘 걸린 차가 갑자기 시동일 걸리지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때에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하셨고 불편을 겪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이 차를 사람이라고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차가 어떤 이유에서든 시동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차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이런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최선의 삶을 살지 않으면 그것이 고스란히 성도들에게로 돌아가겠구나.

반대로 목사인 내가 목사로써의 최선의 삶을 산다면 그것 또한 고스란히 성도들에게로 돌아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가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기도해주고 상담도 해주고 심방하는 것도 될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하는 삶 자체가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최선의 삶이 사랑의 표현이다

내가 최선의 삶을 살면 그 선한 영향력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나타날까요?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나의 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 식구들에게 나타납니다.

그 영향력이 더 커지면 칠곡에서, 대구에서, 대한민국에서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세계 가운데 나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최선의 삶을 살아냄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일도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영석 전 한국신학대학교 총장 이야기

전남 해남에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머슴인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해오고 풀을 베는 일로 가난한 살림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학교에 다니고 싶어졌습니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서 가서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며칠씩 기도하다 하나님께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하나님, 저는 공부가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세요.”

소년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가난한 집안 형편을 적었습니다. 편지봉투 앞면엔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엔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소년의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다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남읍교회 이준목 목사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제자인 이 목사님은 당시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으로,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소년을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신학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엔 고향에서 목회자로 일하다가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나중엔 총장까지 되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오영석 전 한국신학대학교 총장입니다.

최선을 다한 무명의 집배원 아저씨

대부분 이 이야기에서 주목하는 사람은 오영석 전 한국신학대학교 총장이거나, 진학의 길을 열어준 이준목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야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분이 바로 무명의 집배원아저씨입니다.

실제로 어린 오영석 학생의 진로를 열어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집배원 아저씨입니다. 수신인이 ‘하나님’인 편지를 교회에 전해준 집배원 아저씨가 오늘의 오 총장을 있게 한 것입니다.

만일 집배원 아저씨가 이 편지를 보고 애들이 장난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면, 소년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소년은 그렇게 편지를 쓴다고 해서 하나님이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공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그렇게 나타내 본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집배원 아저씨가 자기에게 주어진 우편 배달의 역할과 직무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편지를 집배원 아저씨가 찢어버렸다 해도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배원 아저씨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집배원 아저씨가 비록 편지를 교회에 전달했지만, 그 편지를 통해 진학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소년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처럼 맡은 역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최선의 삶의 중요성을 각인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삶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도 물론 동일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가 나뿐 아니라 나의 가족과 공동체 가운데 엄청난 영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해내게 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 가운데 그렇게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자식들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도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그 최선의 삶이 오늘의 자식들을 있게 했고 나를 있게 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만한 가치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작고 크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기준에서 그렇지 하나님께 보실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맡겨진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들은 자녀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성도는 성도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뿌리의 최선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꽃을 볼 때 마다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꽃이 아름답습니다.

뿌리가 없다면 뿌리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꽃은 곧 뿌리입니다. 꽃은 뿌리에서부터 피어납니다. 뿌리가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뿌리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잊고 살아갑니다. 꽃과 뿌리를 구분함으로써 꽃의 가치만 소중히 여기고, 뿌리의 가치는 마냥 잊고 맙니다. 뿌리의 최선이 있기에 꽃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곧 뿌리의 최선은 꽃을 향한 사랑입니다.

최선의 삶을 산 사람은 영광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3만 2천명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3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따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을 통해 미디안을 물리치십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300명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벅차오르는 승리의 감격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과 300명으로 바다 모래알보다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것은 평생을 가도 있지 못할 감격일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12척의 배로 일본 수군 333척의 배를 물리칩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임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12척에 탄 조선 수군들은 정말 그 날의 감격을 뭐라 표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00명의 용사들도 아마 동일한 감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따로 세우셔서 이런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비록 용기가 없어서 전쟁터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이 승전보를 듣고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했겠습니까? 300명이 최선을 다하여 전쟁에 임하여 승리함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선이며 사랑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최선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선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최선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 모든 사람이 감동하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선이 이 십자가의 사랑을 있게 한 것입니다.

최선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 가운데 성실하지 않고는 결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실하라는 말씀은 사람이 볼 때만 성실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흘랜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당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황금의 통로를 걷는 것이다.” 성실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황금의 통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 가운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