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내리 사랑

‘하나님 사랑(구원)’은 아래에서 위로 치받아 획득할 수 없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서 시류(origin flow, 始流)하여 낙수(落水)된‘내리 사랑’이다.

택자에 대한 ‘복음에의 부르심’과 그것의 화답인 ‘믿음’도 ‘하나님 사랑’의 낙수(落水) 안에 함께 버무러져 있다.

기독교의 요절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는 말씀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하나님 사랑은 누구나 치받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씀의 진의는 “영원 전 하나님의 구원 예정을 입어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믿음으로 영생 얻는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선 ‘구원’이니, ‘영원 전 예정’이라는 적나라한 표현은 없지만, ‘하나님 사랑’과 ‘독생자를 주심’에 함의돼 있다.

그리고 ‘믿음의 근간’이요 ‘하나님 사랑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대속’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예속됐다. 곧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롬 5:8)’으로, ‘택자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수단(계 5:9)’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상수(上數)인 ‘그리스도의 구속’까지 ‘하나님 사랑(구원)’에 있어 예속적인 지위를 점했다면, 하물며 그 하수(下數)인 ‘믿음’이 주도적 지위를 가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에 기반 된 ‘하나님 사랑(구원)’ 믿음으로 치받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믿음’은 단지 위로부터 낙수(落水)하는 ‘하나님 사랑(구원)’을 수납하는 손 일 뿐이다. 믿음을 ‘도전’이나 ‘결단’으로 말하는 이들은, 다 ‘하나님 사랑’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낙수(落水)하는 ‘하나님 사랑’은 오직 수납만 요구할 뿐이다. 하나님 사랑을 ‘내리 사랑’이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애 무용담을 펼칠 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을 즐겨 인용한다. 자신이 쟁취한 사랑도 바로 그러한 불퇴전의 도전의 결과라고 의기양양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간혹 자기가 쟁취한(?) ‘하나님 사랑(구원)’을, 자신의 불굴의 노력과 불퇴전의 도전 덕분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구원)’은 도전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 꼬리쳐 호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시 139:16), 창세 전부터(엡 1:4, 살후 2:13)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해(엡 1:5) 경륜된 것이다.

이렇게 ‘영원’에 뿌리박고 ‘하나님 주권’으로 경륜된 ‘하나님 사랑(구원)’은 원천적으로 인간의 개입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자기의 구원에 개입하려면 그것의 기원인 ‘영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영원한 작정에 기반한 ‘하나님의 의지’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 감금된 인간의 제한된 몸짓으로는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 사랑(구원)’을 받지 못했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받을 수도, 하나님 사랑(구원)을 받던 자가 어느 날 그것에서 갑자기 떨어질 수도 없음은(고전 13:8) 이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신앙 행위는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서 유발된다.

물론 이는 우리의 공격자들이 ‘예정론(predestination)’을 비판하기 위해, 이슬람의(Islamic) ‘운명론적 결정주의(fatalistic determinism, 運命論的 決定論)’ 같은 것을 들고 나와, ‘구원 예정을 받지 못한 자는 아무리 구원을 받으려고 해도 못 받는다’고 비아냥거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 예정’과 ‘인간의 믿음’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믿음’을 통해 ‘구원 예정’이 성취되고, ‘구원 예정’ 안에 ‘믿음’이 내포 된다. 그 결과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믿게 되고(행 13:48), 그리스도께로 가는 자는 결코 내침을 받지 않는다(요 6:37).

‘한 번 구원받은 자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 없다’는 주장을 우리가 강하게 어필하는 것도, ‘하나님 사랑(구원)’이 ‘영원’과 ‘그의 불변의 의지’에 기반 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말이다. ‘영원한 하나님 사랑’이 불변하니 그가 받은 ‘구원’역시 불변하고, 그것의 탈락 역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불가해적인 하나님 사랑

이렇게 ‘영원(렘 31:3) 불변(고전 13:8)’에 기반한 초월적인 ‘하나님 사랑’은 조건적이고 유한된 사랑만 아는 인간에게는 불가해적이고 신비로 다가올 뿐이다. 만일 초월적인 하나님 사랑을 인간 지성으로 다 이해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시선을 나 자신에게로 옮겨, 왜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는지를 자문할 땐, 그 사랑의 불가사의함과 신묘함이 더욱 우리를 휘감으며 유구무언하게 한다.

특히 거부할 수 없도록 낙수(落水)처럼 부어지는 ‘내리 사랑’은 수납자에 의해 변개될 수도 없고, 그 사랑을 더 받아 내게 할 수도, 덜 받아내게 할 수도 없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안심을 준다.

이 ‘하나님 사랑(구원)’의 무차별성은 예수님의 ‘포도원 일군의 품삯(마 20:1-16)’ 비유에서 잘 드러났다. 아침 일찍 부름을 받은 자나, 해 그름 파장(罷場) 때 부름을 받은 자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a denarius)’을 준 것은, 먼저 구원은 오직 불러주신 분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 사랑(구원)’은 사람의 수고와는 무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뜻이다. 곧 일찍 구원에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 많이 봉사한 자나, 늦게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 자나 ‘하나님 사랑(구원)’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일찍 구원에의 부름을 받아 많은 땀을 흘린 자에게 불평 대신 감사를 더 발분시킬 뿐이다. 일찍 자기를 세상에서 불러주어 탕자 생활을 빨리 청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구원)’을 ‘복음’이라 함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영원 불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이보다 기쁜 소식은 없다. 심판을 목전에 둔 죄인이 시급히 알아야 할 것도 바로 이 ‘하나님 사랑’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롬 10:17)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죄인은 이 복음적 ‘하나님 사랑’을 들을 때, 하나님이 택자들을 위해 준비된 ‘믿음’과 ‘구원’이 비로소 소환된다. 다시 말하면, 복음적 ‘하나님 사랑’을 들을 때 생기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왜곡되게도 오늘날 믿음이 ‘하나님 사랑(구원)’을 쟁취하는 수단이 되므로, 믿음이 인간 의지의 산물인 도전, 신념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질된 믿음에는 ‘하나님 사랑’이 제대로 소환되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적 하나님 사랑을 모르면, 바른 믿음이 소환되지 못한다.)

‘하나님 사랑(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 불변한 하나님의 작정에 기반한 ‘내리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믿음이 작동된다. 성령께서 택자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성경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위에 세운 믿음(고전 2:5)’이라고 한 것과 ‘성령으로의 믿음(갈 5:5)’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