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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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전서 5장 1-6절

자녀를 ‘쉽게’ 살게 하려는 부모들

‘몬스터 부모’라는 말이 있다. 학교나 교사에게 자신의 자녀들만을 위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부모를 일컫는다. 몬스터 부모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네가 뭔데, 우리 애를 혼내! 어? 선생이면 다야?

‘헬리콥터 맘’이란 말도 있다. 자녀에게 엄마가 필요한 것은 어릴 적이다. 중학생쯤 되면, 자신이 할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하지만 헬리콥터 맘은 다르다. 헬리콥터 맘인 엄마는 자녀가 성장해 대학생이 되었을 때, 심지어 사회생활을 해도 헬리콥터처럼 자녀 주변을 맴돈다.

맴도는 이유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겨주며, 온갖 일에 다 참견하기 위해서다. 심지어는 자녀의 대학 도서관의 자리까지 맡아준다. 학점 관리를 위해 교수와 면담까지도 불사한다. 사회생활에서 직장 상사가 부당한 일을 시키면 직장 상사에게 따진다.

작가 유인경은 그녀의 책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를 통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까지 말한다. 그녀는 딸이 ‘외로움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다’, ‘사표를 내는 모습이 멋지려면’ 등까지 이야기해 준다.

부모들이 왜 이렇게 자녀에게 집착하는 행동을 하는가? 자녀가 세상을 쉽게 살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가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자녀 인생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자녀가 독립적으로 세상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저는 아들에게 종종 말했다. “독립적으로 살아라.”

이런 교육 때문인지 도움을 주겠다고 해도 대부분 마다한다. 혼자할 수 있는 것은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든든하다.

자녀는 자녀 인생이 따로 있다. 부모도 부모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 인생에 개입한다. 부모가 자녀 인생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중의 착각이다.

부모가 자녀 인생에 개입하면 할수록, 자녀는 세상을 ‘쉽게’가 아니라 더욱 어렵게 살게 된다. 어차피 자녀는 세상을 살 때 겪을 것 다 겪어야 성숙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젊은이들에게 많은 ‘결정 장애’의 자녀만 만들 뿐이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중시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고 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한 말을 많이 인용한다.

몬스터 부모나 헬리콥터 맘은 자녀를 바른 방향이 아니라 빨리 가게 할 뿐이다. 결국 방향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동차가 속도를 위반하면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된다. 언제든지 과속은 금물이다. 과속은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속도가 빠른 것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된다. 바른 방향을 잡은 것은 자랑할 만하다.

인생을 빨리 가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 ‘쉽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 바른 방향 설정을 중시하는 것은 ‘어렵게’ 살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방향이 중요하다. 그 방향이 하나님이어야 한다.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를 택하라

그리스도인은 삶을 ‘쉽게’ 가 아니라 ‘어렵게’ 사는 법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 사상가 겸 문학자로 《월든》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삶은 어렵게 살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 도시를 떠나 숲속에 들어가 불편하게 살았다. 그가 인생을 어렵게 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렵게 산 삶이 지금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철학을 갖게 해주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방향을 틀어주고 있다.

신앙생활도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위대한 삶은 쉽게 사는 삶으로 이룰 수 없다. 어렵게 사는 삶이어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오늘 베드로는 장로들, 즉 교회 지도자들에게 삶을 어렵게 살라고 말한다. 어렵게 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교회 장로들이 쉽게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제 아내는 ‘고생’이란 말만 들어도 극도로 혐오한다. 다른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사람의 본성은 고난이 아니라 행복을 구가하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의 욕망 채우기는 쉽다. 손만 뻗으면 욕망을 채울 것이 널려 있다. 잠실 근처에는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이 넘친다.

반면 하나님의 것 채우기는 많이 어렵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절제된 삶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운 삶을 살고자 해야 한다. 하지만 쉬운 삶을 살고자 한다. 쉬운 삶은 좋아하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 맘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교회 장로들도 자기주장을 펼치며 살고자 한다. ‘눌림’보다는 ‘누림’의 삶을 살고자 한다. 누림의 삶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삶에서 겸손보다는 교만한 삶이 쉽다. 그럴지라도 사람들은 쉬운 자기주장을 펼치며 살고자 한다.

세상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세상의 방식은 쉽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어렵게 사는 것이다.

설교자들을 가르치면서 늘 느끼는 것이 있다. 어려운 공부가 아니라 쉬운 좋아하는 운동, 식도락 여행, 카페에서 이야기하며 쉽게 살고자 한다.

선교지 선교사들도 먹는 모임이 많은 것 같다. 그런 모임에는 사람들이 몰린단다. 하지만 배우는 모임에는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단다. 어렵게 사는 선교사역이 아니라 쉬운 먹는 사역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 말은 어렵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에는 반응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십자가의 삶이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육체가 찢기며 떨어져 나가는 십자가 형틀을 지셨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야 할 삶이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쉽게 살 수 있었지만 어려운 삶을 선택해 사셨다.

구원은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로부터 온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러자 그가 제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것이 마태복음 19장 21-22절 말씀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에게는 자기 소유가 사라지는 것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은 쉬운 삶을 살고자 했다. 자기 것도 누리며 예수님의 구원도 받고자 했다. ‘꿩 먹고 알 먹는’ 아주 쉬운 삶을 살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즉 엄청 어려움을 거쳐야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쉬운 삶이 아니라 어려운 삶을 선택함이 마땅하다. 구원은 쉬운 것이 아니다. 어렵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음을 ‘바늘귀’로 비유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십자가는 지지 못하더라도 십자가의 정신으로 어렵게 사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본이 되는 삶을 살라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할 때, 쉬운 삶이 있고 어려운 삶이 있다. 쉬운 삶은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삶이다. 어려운 삶이란 남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다. 즉 남에게 본을 보이며 사는 삶이다. 그것이 3절이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는 장로들은 양무리의 본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즉 어려운 삶을 선택해 살라고 한다.

불평불만하며 사는 것은 쉬운 삶이다. 불평불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며 사는 삶은 어려운 삶이다.

‘머피의 법칙’이 있다. 나쁜 일이 일어나는 사람에게는 계속 부정적인 일만 생기는 법칙이다. 즉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갈수록 꼬이기만 한다.

머피의 법칙과 같은 상황에서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주 어렵다. 손양원 목사가 자식을 죽인 순사들을 양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일본 36년 역사가 딱 하나 있는 일이다.

이런 삶은 누구에게나 감동이 된다. 누구나 존경하게 된다.

쉽게 살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리더라면 본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나라의 지도자라면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청와대 전 대변인인 김의겸 씨는 은행 대출로 흑석동 집을 구입했다가 자진 사퇴했다. 쉽게 살려고 했다가, 본이 되지 못한 결과다.

그럼 우리는 어렵게 살고 있는가? 이에 대해 각자가 질문해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어렵게 사셨다. 그럼 우리도 어렵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한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된 이유는 쉽게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의 본이 돼야 한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를 열망해야 한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다. 아들에게 최고의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큰 장애 요소가 가부장적인 요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센트럴침례신학대학원 몰리 마샬(Molly Marshall) 총장인 그녀가 한국교회에 ‘쓴소리’를 했다. 그녀는 한국교회가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한국 목사님들은 가부장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기업이나 회사처럼 비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말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한국교회는 가부장적 냄새가 강하게 난다. 기업이나 회사와 그리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살았던 저는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처럼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최근에 와서는 조금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 같다. 다른 것을 몰라도 공부하는 것은 본이 되는 삶을 산다.

제가 공부한 뒤로 아들이 공부를 한다. 최근에는 어느 학회에 글을 써서 1등이 되어 발표도 하고 상금까지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살아야 한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자신 있게 말했다.

본이 되는 삶을 살라

그 다음, 사람들이 우리를 본받을 수 있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다른 말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이 되는 삶이란 다른 말로 책임을 지는 삶이다.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 말과 행동이 일치되도록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책임을 지는 삶은 어려운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어려운 삶인 본을 보이는 삶,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처럼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어려운 삶이다. 어렵게 사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도리어 마귀가 벌벌 떨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살아야 한다

왜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어렵게 살 때 선한 결과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국무총리 후보자로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임명되었다. 이젠 국회 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 전에 상당수 장관 임명후보자들이 자진 사퇴와 권고 사퇴를 했다. 이유는 그들이 세상을 쉽게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택 정책을 펴야 하는 국토교통부 장관후보자가 집을 세 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토지 정책을 펼칠 자격에 의심이 든다. 이유는 단 하나다. 쉽게 살았던 결과다.

저는 사람들에게 꿈이 있냐고 묻는다. 꿈이 없이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쉽게 산다. 그저 먹는 것, 잠자는 것, 노는 것에 귀중한 시간을 사용한다. 꿈이 있는 사람은 삶이 그들과 다르다.

저는 고군분투하며 산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 한다. 하나님 앞에서 고독을 즐기려 한다. 대다수의 시간을 카페, 도서관, 서점에서 책과 씨름을 한다. 써지지 않는 글을 쓰겠다고 머리를 싸맨다. 이는 당장보다는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가 봐도 삶을 어렵게 삶이다.

중요한 것을 만드는 사람은 어렵게 살아야 한다

중요한 제품을 만드는 책임자들은 어렵게 살아야 한다. 쉽게 살면 귀중한 목숨을 잃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위대한 신이시여, 기적을 내려주소서….”

이 기도를 끝으로 비행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조종실의 음성기록 장치는 끊겼다. 비행기는 5000피트(약 1.5km) 상공에서 인도네시아 자바 해에 추락했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다.

위 내용은 2018년 10월 29일(현지 시간) 이륙한 지 10여 분 만에 추락한 라이언에어의 조종실 음성기록장치 내용이다. 이 조사관들에 따르면 절망한 조종사는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밖에 없었기에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끔찍한 항공사고가 일어난 지 5개월 만인 2019년 3월 10일 에티오피아 소속 항공사의 비행기가 추락했다. 또 전원이 사망했다. 그 기종은 인도네시아 사고 기종과 동일한 보잉737 맥스8 기종이었다. 두 번의 사고가 일어나자 비행기 주문을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이 기종의 사고 이유는 엔진을 기체에 맞추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연료 효율을 좋게 하기 위해 비행기에 맞지 않는 엔진을 사용했다.

비행기는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시간도 더 많이 소요되어야 한다. 시험 비행도 길어야 한다. 사고는 보잉 회사가 비행기를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잉사는 비행기 사고 원인이 기체결함 탓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어렵게 살면 하나님의 보상이 뒤따른다

쉽게 살면 큰 사고가 난다. 저는 이런 기도를 한 적 있다. “하나님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세요.”

한참 지난 뒤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쉽게 살고자 했더니 교만해졌다. 결국 하나님의 선물을 발로 찬 꼴이 되었다. 이젠 어렵게 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어렵게 살면 삶에 좋은 열매를 맺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도 어렵게 살면 나타나는 결과를 말씀하신다. 먼저 4절이다.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또 5절이다.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마지막으로 6절이다.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어렵게 산다고 고생만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렵게 산 것에 대한 확실한 보답을 해주신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신앙생활을 어렵게 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처럼 신앙생활을 어렵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신앙생활을 어렵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감옥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신앙생활을 아주 어렵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

바울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어렵게 복음을 전한 바울 때문에 아시아와 유럽까지 복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바울만 그렇지 않다. 베드로도와 야고고도 어렵게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신앙생활을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살아야 한다. 절대로 쉽게 살면 안 된다.

‘쉽게’ 살면 안 된다

왜 쉽게 살면 안 되는가? 바리새인처럼 예수님께 책망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가장 책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인이 책망받은 큰 요인은 ‘외식’하는 신앙생활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절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즉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신 것이다.

외식은 쉽게 사는 것의 대표성을 띤다. 겉은 꾸미는 외식이 아니라 안의 내용을 채우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된다. 하지만 겉을 꾸미는 데는 시간이 거의 소요되지 않는다.

이런 말이 있다. “꾸미지 말고 가꾸라”. 꾸미는 것은 쉽다. 하지만 가꾸는 것은 어렵다.

베드로는 교회 리더들인 장로들이 꾸미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꾸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한다. 즉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한다. 특히, 교회의 리더들은 어렵게 살아야 한다.

남양유업 외손녀인 황하나씨가 마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는 세상을 쉽게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렵게 살아야 한다. 말로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한다. 예배도 일주일 간 준비한 뒤 드려야 한다. 기도의 삶 최선을 다해 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직장생활도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 정직하게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저 사람은 내가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야!’ 라는 말을 듣도록 사회생활 해야 한다.

저는 목사님들에게 교회 리더로서 삶을 어렵게 살라고 말한다. 목사가 쉽게 살면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힘들다. 목사 한 명이 어렵게 살면 교인들은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다. 쉽게 살려고 하면 리더의 길로 들어서면 안 된다.

어렵게 살 때 세상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렵게 살아야 한다. 어렵게 살 때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삶을 살게 된다.

중국에서 울림을 주며 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순성룡(46)이다. 그는 “친구가 빌려준 17만원을 32년 뒤 17억 원으로 갚았다. 순성룡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최근 아빠와 아들이 배가 고파서 마트에서 음식을 훔친 인천의 현대판 장발장이야기가 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마트 주인이 용서해주었다. 경찰관이 먹을 것을 사주었다.

이 사실을 보고 있던 신사가 20만 원을 건넸다. 소식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온정이 답지하고 있다. 현대판 장발장 이야기는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에 큰 울림을 주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세상에 큰 울림을 주어야 한다.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큰 울림을 주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하나님께 큰 울림을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세상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큰 울림’이란, 천둥을 치듯이 사람들을 놀래 키는 것이 아니다. 잔잔하지만 서서히 넓게 퍼져가는 진동과 같은 울림이다.

파도가 세게 치면 사람들이 큰 파도로 인해 무서워서 도망을 간다. 하지만 파도가 잔잔히 치면 가까이 가서 파도와 친구가 되려 한다. 울림은 잔잔하게 울려퍼진다. 그리고 오랫동안 울림을 준다.

어처구니없는 삶은 금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어렵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렵게 살지 않으면 삶을 쉽게 살게 된다. 삶을 쉽게 살게 되면 ‘어처구니가 없는 삶’을 산다.

정민 교수는 《체수 유병집》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의 뜻을 풀이한다.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이 ‘어처구니’는 사실은 맷돌이 맞물리는 곳의 아래쪽 튀어나온 부분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맷돌이란 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래는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서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바로 아래쪽에 튀어나온 부분을 어처구니라 하는데, 과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은 맷돌로서의 아무런 구실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울의 삶은 어처구니 없는 삶이었다.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위를 죽이기 위해 인생을 살았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삶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삶의 결과는 비참하다. 영광의 면류관을 써야 하는데 썩어진 면류관을 쓰게 된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처구니없는 삶이 아니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어렵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 이삭을 산 채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까지 올라갔다.

다니엘에 어떻게 바벨론에서 총리가 될 수 있었는가? 사자 굴에 들어갈 만큼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어떻게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는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사울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고 죽이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 때문이었다.

믿음의 삶은 ‘초격차’를 만들어내는 삶이다

믿음의 삶은 세상 사람과 초격차를 만들어낸다. 권오현 삼성전자 회상이 쓴 책 제목이 《초격차》다. ‘초격차’는 단순히 시장의 파워나 상대적 우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교불가한 절대적 기술 우위와 끊임없는 혁신, 그에 걸 맞는 구성원들의 격을 의미한다. 책은 제목 그대로 삼성은 남들이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살면 초격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 영원과 일시 등의 초격차를 만들어낸다.

그리스도인은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살아야 한다. 어렵게 사는 삶은 힘든 삶이라고 알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어렵게 사는 것은 힘든 삶이 아니라 최고의 삶이다. 초격차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쉽게 사는 삶은 인간이 기뻐한다. 어렵게 사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비록 더딜지라도 어렵게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이 하나님께 기쁨을 주는 삶,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사는 길이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