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강해
요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

42장의 욥기 강해를 완료한 오요한 목사의 시편 강해 ‘역경 속에 피어나는 찬양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집니다. -편집자 주

고양국제꽃박람회
▲ⓒ크리스천투데이DB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복 받기를 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있는 삶을 갈망해 왔습니다. 그릇에도 수저에도 복자를 써 넣었습니다.

단 한 번도 풍요롭게 살아본 적이 없는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이 복이라 여겨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먹을 것이 흔해져,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복 받은 삶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져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사는 것이 복 받은 삶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돈만 있으면 주변에 사람들도 모일 것만 같고, 돈만 있으면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돈만 있으면 사람의 생명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홀리데이>란 영화에서, 실제 인물이기도 한 탈옥수 지강헌이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입니다. 돈 있으면 죄도 없어지고 돈 없으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돈이 곧 세상의 전부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과연 복의 근원이고 복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마이다스 왕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금을 너무 좋아해 신에게 무엇이든 만지면 금이 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그의 손은 황금을 만드는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분명 축복이었습니다. 가치 없는 돌덩이도 만지면 금으로 바뀌니, 그의 손은 분명 축복받은 손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물잔도 만지면 금으로 변해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사랑하는 딸도 손으로 만져 금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음식을 먹지 못해 야위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야기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이다스의 손이 있습니다. 바로 로또입니다. 한 번 제대로 터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정작 로또에 당첨되면, 주변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돈은 있지만 사람을 잃고, 인생을 잃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돈 많은 삶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나 복 있는 삶이라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돈 말고, 세상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까? 미국의 마피아 보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권력이 성의 희열보다 크다.” 권력의 달콤함을 아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치권 사람들을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꼭 복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역대 대통령 모두 권좌에서 물러나 감옥에 가거나 은둔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정치권의 유명 인사들이 한 번의 실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욕 먹고 살아야 하는 권세가들이 복 있다 말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외모가 뛰어나 다른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학교에 있다 보면, 외모가 아름다운 여학생이 지나갈 때 공대 남학생들이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조각 같은 외모에 신이 내린 몸매!”

이 말만 듣고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도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외모도 시간이 지나면 평준화됩니다. 외모도 주관적입니다. 내가 예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밉게 보이고, 예전에 아름다웠던 사람이 지금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도 있듯,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는 파리가 들끓어 단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도 결코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은 물질이나 권세나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복이 되어 주십니다.

1.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삶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절)”.

먼저 복 있는 사람의 소극적인 면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합니다.

악인의 꾀가 무엇입니까?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악인의 꾀란 세상 지혜입니다. 바로 악마적 센스입니다. 세상 어디에 서야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바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삼국지에서 천하를 통일한 조조가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도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66개국으로 분열되었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또한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이들이 뛰어난 지혜를 발휘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사용한 지혜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은 죄를 짓는 길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치 않는 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와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이들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2.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2, 3절)”.

이제 복 있는 사람의 적극적인 면을 말합니다. 악인은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습니까? 그들이 주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당연히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술 마시는 즐거움, 겜하는 즐거움, 친구를 만들고 만나는 즐거움 그리고 여러 여가 활동을 통하여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즐거움엔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즐기는 순간만 기쁨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들은 바로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 복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즐깁니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묵상이라 함은 반복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영접하고자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삶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술 냄새가 싫어서 안 먹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술 있는 쪽으로 끌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경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말씀 공부가 꿀송이보다 달콤한 사람입니다. 말씀이 마약과 같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돌아가서 말씀을 묵상합니다. 나이가 들면 말씀을 다 외우고 차를 타면 말씀을 반복합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고통이라도 순종합니다. 그 후에 오는 기쁨을 바라며 고통을 참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힘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또한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말씀이 없으면 죽은 것과 같아 돌과 같은 무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말씀하신 육체는 더 이상의 그 안에 생명이 없는 죽은 껍데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으로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육체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지금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죽은 후에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얻습니다.

말씀 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능력을 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엔 또한 따뜻한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시냇가의 나무는 가뭄을 타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가뭄 걱정 없이 그냥 형통한 삶을 삽니다. 마음에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열매를 주십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물질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청렴결백하였습니다.

그는 보디발 처의 유혹을 물리치고 순결하였습니다. 그 때 노예살이나 감옥에서 그는 형통하였습니다. 총리 생활에도 형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노예가 되든 죄인이 되든 총리가 되든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그가 싸우는 싸움에서 항상 이기게 하셨습니다.

오요한 시편 역경 속에 피어나는 찬양의 꽃
▲오요한 목사.
3.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의 삶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지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4-6절)”.

악인은 흉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구원자가 없으니 스스로를 구원하려 합니다. 그는 세상적인 지혜 곧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가 겨와 같이 바람에 날리게 될 뿐입니다. 시골에서 벼를 베고 탈곡을 하면 쭉정이는 걸러지고 알곡을 얻습니다. 이제 알곡을 갖고 정미 과정을 거칩니다.

이 정미 과정을 거치며 구별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밥해 먹는 새하얀 쌀과 바로 겨입니다. 겨는 왕겨와는 또 다릅니다. 그것은 쌀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입니다.

악인은 심판의 날에는 겨와 같이 구분됩니다. 악인의 삶은 형통할지라도, 겨와 같이 일시적입니다. 망하다는 잔멸하다로, 철저하게 부수어 없앤다는 뜻입니다. 마치 멧돼지가 감자밭에 들어가 뒤집어엎은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는 말입니다.

악인의 길이 바로 좁게는 한 개인의 삶이 쑥대밭 되는 길이고, 조금 더 넓히면 한 집안이 쑥대밭 되고, 나중에는 한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길입니다. 철저하게 망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믿고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주십니다. 심판의 날에 구원해 주십니다.

오요한 목사(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