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회개는 자신의 때를 갖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준비의 때도 있어야 한다. 회개가 조용한 매일의 관심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또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엄숙한 때를 위해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고백(confession, Skriftemaal)은 그런 때이고, 준비에 의해 선행되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holy act)다. 사람은 축제를 위해 옷을 바꾸어 입듯, 고백의 거룩한 행위를 준비하는 사람도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한 가지만을 마음에 품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떨쳐버리는 것, 자기 자신과 하나 됨 가운데 묵상의 침묵을 입기 위해 분주한 활동을 중단하는 것, 이것은 옷을 바꾸어 입는 것과 같다. 이런 자신과의 하나 됨은 축제의 입장의 조건인 단순한 축제 복장인 것이다.

산만한 마음에는 다양한 것들(multiplicity)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양한 것들 중의 무언가를 본다. 반쯤 감은 눈으로, 분열된 마음으로 그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을지라도 보는 것은 아니다. 분주한 활동 가운데 있을 때, 많은 것들에 대해 걱정할 수 있다. 많은 것을 시작할 수 있고, 많은 것을 행할 수는 있으나 전부 반쯤 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하나 됨이 없이는 고백할 수 없으니까.

고백의 시간에, 진심으로 마음에 결심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침묵하며 남아있다 해도 산만한 상태에 있는 것뿐이며, 마음이 모아지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뿐이다. 그가 고백 없이 말을 하고 있다면, 여전히 수다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마음에 결심을 한 자, 그 사람은 침묵한다. 이것은 또한 옷을 바꾸어 입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시끄러운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허하니까. 침묵 가운데 숨겨질 때, 모든 것은 폭로되니까.

이런 침묵은 거룩한 행위의 순전한 엄숙함이다.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음악가가 더 많을수록, 연회장에서 춤출 때에 더욱 좋다. 그러나 경건한 의미에서, 고요가 더욱 깊을수록, 더욱 좋다.

나그네가 시끄러운 탄탄대로를 떠나 고요한 장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왜냐하면 고요가 영혼에 심금을 울리니까!

그는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진 것을 말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시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의 속사람에서 뿜어내야 할 것처럼 느낀다.

이 표현 불가능한 것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갈망(longing, Længsel)도 결국 표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갈망은 갈망을 재촉할 뿐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고요 속에 둘러싸인 환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표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무가 놀라움으로 나그네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무에 의해 표현된 놀라움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숲속의 메아리는 저 길에 있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숲을 통과하여 설명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 난공불락의 요새가 적의 공격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처럼, 나그네가 아무리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 역시 그 소리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만다.

구름은 자신의 생각을 뒤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구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만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수심에 잠겨 쉬고 있든, 둥실둥실 춤을 추며 놀고 있든, 청명한 날에 바람이 부는 대로 이동을 하든, 자신을 집결시켜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바람과 대항하며 싸움을 하든, 구름은 나그네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다.

바다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흡족하다. 바다가 아이처럼 누워 있다가 입술로 놀고 있는 아이처럼 부드러운 잔물결로 즐기고 있든, 한낮에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살피면서 반쯤 졸린 상태로 남아 있는 너그러운 사상가처럼 누워 있든, 한밤중에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깊게 있게 고민하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교활하게 자신을 숨기든, 자신의 열정으로 분노하든, 바다는 충분히 깊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자는 언제나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공동의 지식이 없다.

수많은 별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운 배열인가! 마치 이 별무리는 서로 동의를 얻어 이와 같이 배열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어 나그네를 볼 수 없다. 이 별들을 볼 수 있는 자는 나그네뿐이다.

결국 별과 나그네 사이에는 어떤 합의도 없다. 이것은 오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적 갈망의 슬픔이다. 왜냐하면 자연에서 홀로 있는 자는 어디에 있든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전체성에 둘러싸인 것이니까. 그가 자연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속삭이고 있는 시내(brook)와 같다. 당신이 생각에 깊이 잠겨 걷는다면, 당신이 분주하다면, 그냥 지나치면서는 이 속삭임에 주목하지 못한다.

당신은 이 속삭임이 존재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멈춘다면,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그 속삭임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을 때, 그 속삭임은 당신을 설득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설득했을 때, 당신은 허리를 굽히고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허기를 굽히고 그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가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당신을 사로잡았을 때, 당신은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당신은 결국 정복된다. 당신은 완전히 도취되어 그 옆에 쓰러지고 만다.

설명이 다음 순간에는 나올 것처럼 보이는 매 순간마다, 다만 시내는 계속 속삭이고 있을 뿐이다. 나그네는 시냇가 옆에서 늙어갈 뿐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