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옥 박사.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은 위대한 문학가 도스또옙스끼의 문학적 골격을 만들었고,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이름은 도스또옙스끼의 위대성 때문에 불후의 사건으로 역사에 남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각별히 친분을 나눈 사이는 아니다. 도스또옙스끼는 체포된 후 형이 집행되기까지 페트로파브로프스크 요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당시 썼던 공술서를 보자. 이 공술서는 페트라셰프스키에 관해, 또 그의 집에 금요일마다 드나든 사람들에 관해서 모든 것을 쓰라는 당국의 요청을 받고 작성한 것이며, 도스또옙스끼의 고백적 일기 같이 작성된 글이다.

당국이 요구한 것은 세 가지 항목이었다. 첫째는 “일반적 인간으로서 페트라셰프스키는 어떤 인물인가, 유해한 인간인가. 또 사회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로 해를 끼치는 인간인가”, 두번째는 “금요일 밤 모임의 목적은 무엇이며 실제로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으며 도스또옙스끼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집회에 대한 도스또옙스끼의 솔직한 견해는 무엇인가” 등이었다.

<금요일마다 나는 그의 집을 찾고 그도 종종 내 집을 찾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나와 그는 극히 친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든 것은 거기에 가면 서로 잘 알기는 하면서도 만날 기회가 없는 그런 친구를 거기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페트라셰프스키를 항상 성실하고 고상하고 심오한 인간으로 존경해 왔다. 그는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대단한 독서가였다. 항상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그의 지성의 힘에도 불구하고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페트라셰프스키의 인간적 면모에 대하여는

<나는 오래 전부터 페트라셰프스키가 모종의 자존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 자존심 때문에 그는 금요일마다 자택에 사람들을 모았고 그 자존심 때문에 그 모임을 지탱해 왔다.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자택에 많은 양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고 진귀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알아준다는 사실을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도스또옙스끼의 이같은 진술 외에도 페트라셰프스키는 무모할 만큼 의협심이 강했다. 투옥당하여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도 그는 옥중에 있는 친구들의 건강을 걱정하였다. 당국에 독서와 산책을 허락하도록 요청도 하고 특히 도스또옙스끼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는 그들이 기질적으로 보아 정신착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며 각별한 주의를 해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도스또옙스끼 같은 재능은 사회의 보물인데 만약 그가 정신착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건 주모자인 페트라셰프스키에게는 더 고문이 심했다. 뜨겁게 달군 철로 발을 달구고 식물에 황산을 넣어 내장을 헤집었다. 바깥에서는 벽면을 두드려 그의 수면을 방해하였다. 식물에 염분을 빼내고 먹게 하였기 때문에 페트라셰프스키는 부족한 염분을 자신의 오줌으로 보급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강한 의지로 인내하며 견디어 나가면서 죄수복을 입고도 농담을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놈들 , 기막힌 옷을 입혀주는군. 이런걸 입고있으면 나 스스로도 나 자신에게 싫증이 나겠는걸.>

그 말을 듣고 취조하던 부사령관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뭐라고 하는 거여, 이 짐승같은 놈> 하고 소릴 질렀다.

<짐승같은 놈은 내가 아니고 너 같은 놈이다. 네가 거꾸로 죽는 꼴을 한번 보고 싶구나> 하고 수갑을 찬 채 호통을 쳤다.

어느 날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이 돌아오자 옆에 있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나 심한 고통에 지쳐버렸소, 당신의 학문의 힘으로 건강과 이성을 내게 돌려주시오. 내게 지금 그것이 필요하오>

그는 한때 정신착란을 일으켜 광인복을 입고 침대에 붙들려 매여 있었으나 끊임없이 반항하고 투쟁하면서 인간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의 의식은 침묵을 거부하였다. 고문관이 그에게 “대답안하면 네놈의 몸둥아리를 칼로 찔러 벽에다 붙여놓을테다” 라고 소릴 지르면 “그래 갖고 뭘 얻을 작정이요. 약간의 피, 그것일 뿐일텐데” 라고 페트라셰프스키는 태연하게 응수했다.

도스또옙스끼와 마찬가지로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되어 시베리아 유형길로 떠날 때 군중 사이에서 어떤 사나이가 나타나 자신의 모피 모자와 외투를 벗어 페트라셰프스키에게 던져 주었다. 그후 페트라셰프스키는 채금장과 공장에서 노역으로 복무하다 1856년에 일크츠크 유형촌으로 옮겨진다. 그곳에서도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죄수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유형수들의 생활개선과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속한다. 지방신문에 전제정치의 죄상을 고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투쟁은 그를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벽지의 유형지로 내몰고, 결국 에니스현에 있는 베리스코에촌에서 1886년 12월 심장병으로 급사한다.

아깝게도 페트라셰프스키는 요절하고, 사건은 도스또옙스끼의 위대성 때문에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이름을 문학사에 각인시킨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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