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의 신분과 사명의 목적

예수가 그의 신분과 사명(status and mission)을 가지고 구원하여 가르치시려고 했던 그의 전도와 교육의 대상 인물들의 신앙은 크게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모세의 글도 믿지 않고 예수의 말도 믿지 않고”(요5:47), “복음의 향기를 통해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오히려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았던 자들의 죽은 신앙”(고후2:16),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며”(계3:1,15),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 같은 신앙(유1:12), “죽은 자들에 의해 장사될 날만을 기다리는 시체 같은”(마8:22) 신앙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지도자는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던”(마15:14)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이 지도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은 사실”(창3:17)에 대한 어떤 근본적 행답을 성경에서 찾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나, 다소 출신의 젊은 동료 바리새인 사울은 그들이 유일하게 내세우는 율법을 “저주거리”(롬7:9, 갈3:13, 4:5)로 알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민하는 상황 등은 돌아볼 여가가 전혀 없이, 오직 그들의 폐쇠된 체제 안에서 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둘째 부류의 신앙인들은 이런 죽은 신앙인들에 대해 비판을 하나, 바른 개혁의 방향을 모르고, 소란만 피우는 이름뿐인 ‘열심당’이나, 또는 이름뿐인 ‘진보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셰례 요한의 그 진가(眞價)는 오해하고, 그 외부적 열정만을 성원(聲援)하거나, 심지어는 바라바 같은 폭도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어보는 유(流)의 신앙인들이었다. 예수를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고 고개를 틀던 나다나엘(요1:46)은 이런 비판자들 중에서 조용한 샛님 형의 신앙인이었으나, 그는 예수를 대면한 순간 즉시 일변했었다.

셋째 부류의 신앙인들은 위의 두 부류의 신앙인들보다 훨씬 명민(明敏)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놀랍게도 예수와 단 하루를 거하고 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는 말로 매우 바르고 빠르게 예수를 고백했던 빌립이나 안드레 같은, 구약성경에 밝고, 메시아 대망 사상이 투철했던 신앙인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과 그들의 형제들은 모두 일차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요 성경에 능했으나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던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주어서 아볼로로 하여금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게 했던” 에베소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행18:24-28)도 이런 명민한 신앙을 가졌던 평신도 사역자들이었다.

그러면 예수는 위의 세 부류의 신앙인들을 어떻게 가르쳐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그의 사역자들로 사용하셨던가. 일차적으로 그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자신의 신분과 사명에 관한 예언들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밝힘으로서 A.Schlatter(1852-1938)는 예수의 성경관이 자신의 신자성(神子性)과 메시아성(性) 등 근본적 문제들에 있어서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파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유일성, 성경의 영감, 죽은 자의 부활 교리 등에서는 일치했던 점을 중시했다(The History of the Christ, tr. by A.Kostenberger, Baker, 1997, p.44).

그들도 세계에 나가서 예수의 방법대로 구약을 인용하고 거기에 예수의 새 교훈을 접목시키는 설교, 즉 그들이 예수의 높은 신분과 사명을 전하는 설교를 하게 했었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아 신분과 사명의 목적이었다.


2. 예수의 구약 인용 방법

예수의 구약 인용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살아있는 글을 죽은 마음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있는 주해(註解)의 정신과 노력으로 인용하는 방법, 즉 삼위의 하나님의 성경 계시, 해석, 교육 활동과 연속선상(連續線上)에 있는 인용이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죄인들에 대한 구원 계시의 개진(開陳 disclosure)과 그 해석, 교육을 위한 직접적이고 연속적인, 따라서 사람에게 상관성 있는(relevant) 활동에 관하여 다음의 성귀들은 그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구절둘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 구절들 자체가 최상의 설교 본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창1:1-5(창조의 초기에 혼돈과 흑암 세계의 수면 위를 운행했던 “하나님의 신”은 성령이었으며, 해, 달, 별의 빛은 제4일에 지으셨으니 이 자연의 빛과 대조되는 첫째 날에 지은 빛<3省>은 그리스도로 볼 수 있다).

2. 사59:21(이사야가 예언한 ‘신약시대의 새 언약’의 성격에서 하나님이 구원 받은 새 백성에게 주실 “그의 신<성령>과 말<성경>이 새 백성들의 후손과 그 후손과 그 후손에게서 영원하리라”고 하신 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예고한 것이다).

3. 렘16:14,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맹세는 그들이 출애굽시에 받았던 석비(石碑)의 모세 율법을 뜻하고, “이스라엘을 북방 땅과 그 모들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맹세는 그들을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때에 이스라엘이 받았던 새 율법, 곧 그들이 모세 율법의 무력함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영혼의 심비(心碑)에 새겼던 새 계명, 새 은혜 언약”(렘16:14,15, 23:7,8, 31:7-9, 33장)을 의미했다. 남과 북의 위치가 정반대이듯 율법과 복음의 정반대되는 성격을 극명하게 나타낸 은유(隱喩)이다. (‘남방 언약과 북방 언약’, 한제호,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p.404, 성경의 해석과 설교, 진리의 깃발, 상권, 1999, p.121).

4. 마22:43-45,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에서 다윗의 이 시 자체의 중요한 의미와. 예수가 다윗의 이 시를 “성령의 감동으로 썼다”고 해석한 사실과, 이 시를 예수가 그의 죽으심을 이틀 앞두시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그의 최후의 교훈들을 말씀하시던 그 중요한 자리에서 인용하신 사실의 중요성 등에 나타난 ‘말씀과 성령의 관계’의 심오한 깊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5. 눅24:32,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나하더냐”고 했던 제자들의 체험담은 모든 신자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 해석을 받을 때에 경험하는 성령의 직접적 감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6. 요1:1-4, “하나님의 삼위(三位)와 말씀의 일체성(一體性)”.

7. 요3:31-34, “하나님의 보내신 이(=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라”.

8. 요4:23,24, “하나님은 영(=성령)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진정과 신령(=성령)으로 예배할지니라”. 이런 예배를 통하여 사마리아 여인은 즉시 자기 앞에 계신 예수를 만나서 그에게 예배를 드렸고, 더 나가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하므로서 제사장과 전도자의 사명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9.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였으나, 이제 그 영생은 “영생의 말씀의 관리자<管理者>”이신 예수에게 위임되었다). (참고: 시139:7, “내가 주의 신<=성령>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0.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성부, 성자, 성령 삼위와 진리<=말씀>가 영원히 신자들과 함께 거함).

11. 요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自意)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13절에 성령은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신다”는 말씀과 14절의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듣는 진리를 말한다는 뜻보다도 ‘예수에게서 듣는 것을 말한다’는 뜻이 명백하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 전파에서 순복음교회 같이 성령의 사역을 중심시함은 성경을 오해하는 부당하고 또 무익한 노력이다.

12. 행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으로 사도들에게 말씀을 명하셨는데, 그 명하신 말씀의 내용은 예수의 복음이요, 성령의 이적이 아니었다).

13.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들의 말했던 방언의 내용은 요16:13, 14의 예수의 분부와 같이 오직 예수의 복음 뿐이었으며, 성령의 기사나 이적의 강조와 선전이 아니었다).

14. 행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에서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는 ‘I will give you the sure mercies of David’(A.V.) ‘내가 다윗의 확실한 자비를 너희에게 주리라’, 또는 ‘I will give you the holy and sure blessings of David’(R.S.V.) ‘내가 너희에게 다윗의 거룩하고 확실한 축복을 주리라’로 번역되는 말로서, ‘호시아스’는 다윗이 받았던 메시아의 부활 예언이 성령과 관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15. 고전2:15,1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바울의 말씀은 신자들 중 어떤 신령한 자는 성령으로 말씀을 해석하기도 하고, 이웃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말을 할 때에 그에게는 성령의 권세가 임하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권세는 심지어 그가 그리스도까지도 가르칠 수 있는 영적 권세라는 비밀을 사도가 조심스럽게 밝힌 말씀이다.

16. 고전3:1-4,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서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에서 사도는 “너희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가 아닌 장성한 사람이라면 말씀의 해석을 성령의 직접적 지혜로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17, 고전 12:8-10, “성령의 8 가지 은사들 중 첫째는 지혜의 말씀, 둘째는 지식의 말씀이라 하여 성령의 은사가 말씀 이해와 그 전파임을 사도는 밝혔다. 순복음교회가 겉으로는 정통교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방언, 기적 등을 강조함으로 어린 신도들을 속여서 교세의 확장만을 꾀하고 있음은 큰 오류이다.

18. 고전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에서 첫째, 바울 사도의 성령 안에서의 권세의 높음, 둘째, 일반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고(自高)의 위험성을 배우자.

19. 고전15:45,46,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에서 첫째, 아담과 그리스도의 근본적 차이와, 인류의 두 머리의 기능의 차이, 둘째, “살려 주는 영”이신 예수 안에서 신자들, 특히 설교자의 불신자들에 대한 “살려 주는 말씀 사역의 책임의 중함”을 깨닫자.

20. 고후12:7,8,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첫째, 하나님의 삼위는 사도에게 “지극히 큰 계시 이해의 은혜를 주셨음”과 동시에 둘째, 성령의 적대자인 “사탄”의 역사(가시)도 그 큰 은혜와 함께 주셨던 비밀을 우리도 깨닫고, 우리에게도 동일한 주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순종하자.

21.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에서 첫째, 사도 요한이 받았던 사도로서의 성령의 감동이 계시록의 내용 같은 위대한 선물을 인생에게 주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둘째, 우리 각자도 특히 성수주일 하는 생활을 통해서 이런 은혜에 참여하고, 또 이런 은혜를 이웃에게 전파하자.

예컨대 예수는 자신보다 1000 년 전에 다윗이 썼던 시16:10에 토대해서 베드로가 오순절 날 메시아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그를 감동시켜서 그 한 자리의 설교를 통해 3000 명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베드로를 사용하셨다. 예수는 또 베드로가 오순절에 사용했던 설교 본문과 동일한 본문인 다윗의 시들(2편, 16편)을 토대로 후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케 하셨는데, 바울의 그 설교를 들었던 그 성의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부탁하더니, 과연 다음 안식일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성민(城民) “거의 모두가 그의 설교를 다시 들으려고 회당에 운집하도록” 예수는 바울의 설교 본문 선택과 그 설교 내용 구성의 뒤에서 역사하셨다(행13:42-44). 따라서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들의 이런 대역사들은 모두 예수의 살아 있는 구약 인용 방법을 그들이 그대로 설교에서 적용했던 결과였던 것이다.


한 제 호 목 사(전 한국성경신학회 회장 1997-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