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더불어 시작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정치체제인 "왕조(王朝) 체제"(monarchism)는 행복한 징조를 갖고 출발하지 못하였다. 사울 왕조는 그 출발 때부터 종교적 기반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신정(神政)정치(政治)의 지도자인 사무엘과는 자주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고(cf. 삼상 8:10-31), 따라서, 사울은 악령(惡靈)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신명기 사가는 사울에게 일어난 이러한 운명의 대 전환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惡靈)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이것은 "카리스마"에 의하여 지파 통치권이 부여되던 사사시대의 신정정치의 권위가 사울에게서 떠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자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라고 평가한 신명기 사가의 평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다윗은 이렇게 하여 사울이 왕으로 재위하고 있는 기간에 이미 신정적(神政的) 왕통을 사무엘로부터 전수받았던 것이다.

다윗은 이 일 이후에 그가 취한 여러 행적들을 통하여 정치력과 군사 지휘력에 있어서 가히 "천재"라고 할만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존의 사울 왕실 속으로 악기(樂器)를 다루는 음악인으로서 그리고 탁월한 전투능력을 가진 전쟁영웅으로서 접근해 들어갔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신정 전통과의 마찰로 인하여 심한 번뇌에 사로잡혀서 "악령"에게 시달림을 받을 때, 다윗은 음악을 이용하여 사울의 번뇌를 달래어 주는 왕의 측근으로서 왕의 앞에 서게 되었다. 다윗이, 후일, 많은 시(詩)를 남긴 이스라엘의 시가 문학 전통의 비조(鼻祖)가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음악가적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윗의 시인적 정서는, 아마도, 수차례에 걸친 사울 왕의 집요한 살의(殺意)가 담긴 공격을 오히려 관용의 지혜로 극복하게 한 그 근본요소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시인(詩人)으로서의 다윗의 이러한 정서는 나뉘어져 있는 12지파를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하나의 포용력이 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무엇보다 지혜롭고도 선견지명이 있는 정치인이었다. 우선, (1) 그는 강력한 왕권전통을 신정(神政) 이념(理念)과 조화시키는 지혜를 성공적으로 발휘한 정치인이었다. 저 유명한 "나단 신탁(神託)"(삼하 7장)에서 다윗은 예언자 나단을 통하여 영원한 왕위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는 말씀을 듣는데, 이는 <오직 야훼 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오직 야훼의 말씀 만이 진리>인 것을 믿는 그의 믿음의 결실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다윗은 후일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저질른 범죄행위에 대하여 예언자 나단의 책망을 받았을 때, 그 책망에 겸허히 복종할 줄 아는 신앙적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룩한 막강한 정치권력을 하나님의 법의 권위 아래 과감히 복종 시킬 수 있는 지혜였다. 즉 나단의 책망 앞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삼하 12:13)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다윗은 그가 이룩한 강력한 군주국가를 신정체제 위에 굳건히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2) 다음으로, 다윗은 그의 왕국의 중심부인 수도를 세울 때 여러 가지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모두 초월하여 긴장 속에 있는 남북 지파 영역의 정확한 중앙 경계선에 한 이름없는 여부스인의 땅인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을 확보할 때도 다른 지역에서와는 달리 순수한 다윗 개인의 용병(傭兵)을 동원하여 그 땅을 점령하였고 그 곳에 신정(神政) 정치의 기초인 법궤도 옮겨 놓았던 것이다.

즉 엄격한 정치적 중립지역에 정치의 중심지를 세우고 이러한 세속 정치의 중심지에 종교생활의 심장부인 법궤를 옮겨 놓음으로써 세속정치의 기초를 하나님의 법 위에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윗은 정치와 종교를 모두 자신의 휘하에 두어 총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지파들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충돌되지 않은 채 통일왕조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바로 이러한 다윗의 탁월한 정치능력에서 기인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 수행 능력이 빛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의 탁월한 군사 통치능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믿을만한 참모들을 세울 때 가나안인 중심으로 세우고 가나안인을 포용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그렇게 하여 일차적으로 다윗은 가나안 땅에 군림하고 있는 불레셋 세력을 격파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불레셋을 제압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불레셋인들의 하수인으로 들어가 불레셋의 모든 사정과 전략을 익힌 다음 그 불레셋을 가나안으로부터 몰아내는 일을 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영토확장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동남지역으로는 암몬, 모압, 에돔을 모두 이스라엘에 병합시켰고 북으로는 아람(시리아) 족의 영역 모두와 더욱 북상하여서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즉 남으로는 애굽 세력을 제압하고 북으로는 헷제국을 제압하는데까지 성공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세운 이 거대한 왕조는 그 이후 400여년 동안 유다 왕조를 그의 이름으로 부르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왕조는 비록 신명기 사가(열왕기 기자)에 의하여 엄격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일, 역대기 사가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유일한 희망으로 이스라엘 사(史)에 기리 남도록 이상화(理想化)되었다. 다윗의 모든 인간적 허물은 그를 이상화하는 역대기 사가의 새로운 역사구성에 의하여 철저히 제거되고 다윗은 마침내 다윗 왕조를 통하여 세계를 구원할 장차 올 "메시아"의 모형이 되었다.

즉 다윗은 전무후무한 가장 이상적인 의(義)의 왕이요 평강(平康)의 왕이며 인류구원의 희망을 실현할 장차 올 메시아의 원형으로 역대기 사가에 의하여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역대기 사가의 이러한 역사 재구성은 모세로부터 사무엘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나타난 신정정치의 이념구현을 예루살렘 제의(祭儀) 정치를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 속에 확고하게 출범시킨 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에 철저하게 기초하고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윗의 예루살렘 천도(遷都)와 그 예루살렘 왕도(王都)의 중심부에 법궤를 안치하여 신정정치의 확고한 기초를 놓은 이러한 다윗의 업적은 신정정치 이념을 살과 피로써 물려받은 이스라엘 전통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다윗을 이상화하게 하고 뿐만 아니라 다윗을 장차 올 메시아로 이상화하여 희망하게 한 그 실제적 동기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성격의 다윗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인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비문처럼 각인되어 있다.

김이곤 교수(한신대 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