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1. 하나님의 응답과 창조과학회 사역

창조과학회의 간사로 부르시던 80년대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가 간사로 학회의 부름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요 기도 응답이었다.

내 첫 직장은 유가공 회사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라고 작정은 하였으나 자연 과학을 공부하고 삶에서는 문학적 방황을 거듭하던 내가 갈 수 있는 직장이 있을까? 그런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혹시 하나님은 내게 신학을 해서 주의 종의 길을 가라고 권유하시는 건 아닐까? 다니던 유(乳) 가공 회사를 퇴직하고 말씀과 기도와 묵상 중에 하나님은 놀랍게도 창조과학회로 나를 이끄셨다. 창조과학회의 일을 하기엔 힘도 부족하고 학회엔 전혀 연고도 없는 처지였기에 인간적으로 보면 우연일는지 모르나 나는 학회의 일을 감당하게 되었던 일이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배려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전 1:25-29).

창조과학회는 내 젊은 날의 전부였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과 세 자녀와 불치병으로부터의 치유 그리고 무수히 많은 귀한 신앙의 동역자들을 만난 곳이 바로 창조과학회였다.

하지만 초창기 학회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사무실은 한국대학생선교회(씨씨씨) 김준곤 목사님의 배려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고 학회서 출간된 책이란 외국책을 여기저기 짜깁기한 겨우 두 권의 단행본이 고작이었다. 창조과학회는 당시에도 학문과 신앙에 탁월한 인재들은 많았다. 문제는 그 분들이 모두 직업을 가진 파트타임 일군들이라는 것이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그런 면에서 탁월한 인재들이 많았던 그곳에서 나는 걸레처럼 몸으로 학회의 밑바닥을 닦는 일꾼이 되기로 작정하였다. 정기 간행물을 발간하고 책 출판, 편집, 판매, 관리, 재정, 사무, 행정, 상담, 정기, 비정기 세미나 연락과 준비와 집회 사역, 심지어 출장 영화 상영 등 온갖 다양한 실무와 굳은 일들을 사무 간사 자매와 둘이서 모두를 감당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힘 주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분기로 간행되고 있는 학회 메거진 창조를 당시는 정규 월간으로 4천부 발행하며 원고청탁, 번역, 편집, 발송을 모두 자체의 힘으로 행하였으니,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감당하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기만 하다. 컴퓨터는 물론 자가용도 없었고 비용을 줄이려고 손으로 발송 도장을 찍고 풀로 주소와 봉투를 붙여 리어카를 동원하여 회지(會誌)를 우체국에서 발송할만큼, 지금은 그런 풍경이 상상도 잘 안되는 시절이었다. 그만큼 창조과학회는 모든 면에서 가난했었다. <창조>지가 현재 144호가 발간되었으니 그 가운데, 100 여호는 필자의 땀이 묻어있는 셈이다.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중에서도 <창조> 회지를 정규적으로 발간하게 된 일, 학회의 사단 법인화, 현재의 학회 사무실 마련에 결정적 계기가 된 당시 계몽사 부회장님과의 놀라운 연결, 정규 세미나, 국제 학술대회 개최, 검인정 교과서 논쟁, 대전 창조전시관 운영,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복음 만화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인가>와 <공룡도 하나님이 만드셨을까> 그리고 당시 회장 이시던 김영길 현 한동대 총장님과 정순량 박사님(우석대)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자연과학>의 출간, 과학계의 사도 바울과 같은 김영길 장로님을 모시고 춘천, 태백, 인천, 수원, 부산, 대구, 진주, 마산, 울산, 전주, 목포, 남원, 대전, 수많은 기도원 등지로 자가용과 야간 열차로 동행하면서 넘치게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늘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며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묵묵히 굳은 일을 감당해내고 있는 학회 간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는 그분들의 애환과 수고를 잘 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간사들의 등 뒤에서 늘 지켜보고 계심을 기억했으면 한다.

2. 새로운 사역, 목회

유가공 회사를 그만 둘 적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만 두고 창조과학회 간사로 사역 하였기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싸인만 있으면 언제든지 만사를 제껴두고 또다른 사역의 길을 찾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쑥 그 날이 찾아왔다. 생각은 늘 있었으나 갑자기 사역을 놓고 바람처럼 떠나간다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하드라도 떠날 날을 늘 기다려왔기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치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또 다른 낮은 곳을 찾아 학회를 떠났다.

목회의 현장은 전혀 달랐다. 눈물과 기도와 씨름이 이전보다 더욱 필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창조과학회보다도 더욱 은혜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외환 위기를 맞아 생존의 씨름을 하던 교회를 물질과 기도로 도운 동역자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뜻밖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힘겨워하던 주님의 몸된 교회를 도왔다. 그들에게는 적은 물질이요 도움이었을지 모르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는 생존을 지탱한 손길이었다. 한 가정으로 시작된 교회는 40여 명이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로도 나가고 사역도 나가고 결혼하여 분가도 하고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신 분들로 몇몇 된다. 교회는 여전히 작고 연약하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몇몇 선교사와 단체를 섬기고 있다.

3. 목회 사역과 창조 신앙

며칠 전 한 성도가 교회에 새로 등록을 하였다. 심방 간 그 집에서 우리 교회 권사님께서 불쑥 우리 교회 와서 처음 들었던 창조에 대한 설교의 충격을 간증하셨다. 뜻밖이었다! 아! 우리 권사님께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창조 설교가 그 분에겐 큰 감격이었구나!

내 책을 읽고 은혜 받았다는 서울대 박사 과정에 있는 한 형제가 신앙 상담을 요청해 온 적이 있다. 얼마 전 그 형제가 교회를 찾아왔다. 차를 마시고 함께 기도하고 가면서 교회를 나서던 형제가 봉투를 하나 조용히 내밀었다. “목사님! 나도 얼마인지는 모르나 그동안 아르바이트와 연구원 수당 등으로 수개월 모은 십일조 전부입니다. 기도 중 하나님께서 참기쁜 교회를 떠올려 주셨어요!” 눈물이 울컷 치밀었다. 우리 교회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교회의 생존비였다. 단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봉투를 붙들고 기도하며 울었다.

지방 집회에 참석하여 필자의 창조 강의를 듣고는 우리 교회와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간 날 때마다 꼭꼭 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법률을 공부하시고 공직에 계신 성도도 계신다.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었어요. 그런데 조덕영 목사님 창조 강의를 듣고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지난 11월호 어느 잡지에서 우연히 본 한 고등학생의 간증 대목이다. 목회 현장에서도 여전히 창조 사실의 증거는 긴요하다. 그만큼 세상은 여전히 우연주의와 무신론의 구름이 잔뜩 덮여있다. 복음의 출발은 언제나 성경적 창조 신앙부터이다.

4. 새로운 도전을 위해

몸은 창조과학회를 떠났지만 여전히 목회와 강의와 집회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쓰면서 필자는 교계의 많은 사람들이 창조과학 운동에 대해 긍정의 눈만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창조과학 운동에 대해 반감과 오해를 가진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필자에게는 늘 피곤하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이제는 한번쯤 진지하게 검토해볼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유에 대해 귀를 막지 말고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 인지 일단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이 있게 마련이다. 교회든 교황이든 단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울과 바나바도 마가의 문제로 크게 싸우고 헤어지지 않았던가. 남을 절대적으로 계몽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의 단체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창조론 운동을 하는 복음주의 일군들에게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성령의 학교’(기독교 강요 3. 21. 3)나 ‘하나님의 학교’는 과학자들만의 학교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알고 있었다. 대중이나 성도들이나 목사들은 과학에 대해 어리석으니 우리들이 과학선지자적인 눈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조급성을 버리고 오히려 섬기려 하고 과학기술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보고 때로는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 루터와 칼빈처럼 우리는 배우는 데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가르치시지 않을 때에는 지혜로와지려는 노력을 멈추어야 한다. 대개 과학자들은 남보다 내가 과학적 분석의 눈은 나으므로 과학을 가지고 남을 설득할 수 있다는 지사(志士)적 열심은 좋으나 계몽적 열심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지적 설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우호적 분위기에서도 그런 우려를 보게 된다. 창조론은 지적 설계보다 훨씬더 성경적이다. 둘은 질적으로 다른 운동이다. 지적 설계는 성경을 제외 시키고 설계에 접근 하려는 자연신학의 정교한 시도라고 뎀스키는 주장한다. 때로는 이신론(理神論)적이기까지 하다. 지적설계는 카톨릭, 기독교 진보, 보수, 근본, 유태교, 이슬람, 심지어 힌두교와 불교도들과 통일교, 몰몬교도, 여호와의 증인, 만민교회 류의 이단들까지 토론의 장터에 뛰어들 수 있는 성경을 배제한 운동이다. 심지어 앞으로는 포스크모던이나 유신론적 지적 설계까지 뛰어들면 그 방향은 것잡을 수 없이 될 수도 있다. 미 대통령 부시가 동의했다고 지적 설계가 무조건 성경적 복음주의 창조론 운동에 우호적인 운동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지적설계 컨퍼런스에 미국의 창조과학(ICR) 계열의 창조론 운동가들은 부르지도 않았고, 참석하지도 않은 것이다. 지적 설계 운동의 선구자 중 대표적인 사람인 뎀스키가 자신의 작업에 공헌한 50여명의 학자들 중 범 창조과학 진영이라 할 수 있는 ICR이나 AIG, CRS 계통의 과학자는 한 사람도 거론치 않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반면에 창조과학 그룹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 관계에 있는 휴 로스나 로버트 뉴먼, 데이비스 영과 같은 사람들은 지적설계운동에 참여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듯 미국의 지적설계는 분명 창조과학과 대립한다.

바라기는 한국의 창조과학운동은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복음주의 학자들의 충고와 연구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반대로 지적설계운동은 범 자연신학, 자연철학적인 지적설계운동이 아닌 복음주의 지적설계운동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였으면 한다.

이제 창조과학회는 신학에 대한 시니컬한입장이나 미성숙한 입장을 벗어나 신학에도 귀를 기울이고 좀 더 친구와 적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너무 주장의 폭을 좁히면 어거스틴, 루터, 칼빈, 벤자민 워필드, 그리고 최근 목회와 신학에서 인터뷰한 마크 놀(역사학자)이나 A. 맥그라스(분자생물물리학자요 신학박사), 프란시스 쉐퍼, 존 스토트같은 탁월한 복음의 사람들까지 모두 적으로 만드는 누를 범할 수 있다. 하나님은 과학자들보다 길이와 높이와 폭과 넓이가 크신 분이다!

텍스트는 바뀌지 않으나 컨텍스트는 늘 바뀐다. 과학의 패러다임이 늘 바뀌듯 신앙 운동의 컨텍스트는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도 바울 시대처럼 범선을 타고 유라굴로의 광풍을 체험하며 굳이 파도를 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과거가 아닌 21세기 형 세상의 수많은 유라굴로 광풍을 뚫어야 한다. 창조론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초창기 필자가 모시던 김영길 박사 시대는 분명 무신론과 우연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 KACR이 하나님이 주신 신앙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였다. 포스트 김 박사 시대에도 여전히 거기에 머무르는 누를 범했다. 지금은 순진한 성도들을 단순히 과학의 이름으로 계몽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안티 기독, 안티 창조과학 자료들이 디지털 안에 그득하다. 이제는 미국제 창조과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에는 탁월한 믿음의 과학자들이 충분히 많이 있다. 이제 그들을 통해 보다 다양한 성경적 창조 신앙의 논문과 저서가 많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세상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창조과학회의 홈피가 일부 에세이류를 제외하면 자체 논문은 보이지 않고 온통 순환논리적인 외국제(ICR이나 AIG, CRS)의 칼럼이나 에세이물, 번역물로 가득찬 웹의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외국 이론을 무분별하게 아무런 평가없이 답습하기보다 우리 민족, 이 시대에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과 인문학적 연구자들의 작업과 성과들에도 귀를 귀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창조과학은 이제 그 작업을 시작할 능력과 때가 충분히 되었다고 본다(2005년 <창조>지 기고문 中).

이것이 필자가 창조신학연구소를 시작하고 서로를 독려하고 서로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창조론오픈포럼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