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천편일률적으로 사랑하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란 특별은총으로서의 ‘구원의 사랑’이다. ‘햇빛과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차별 없이 내려주시는(마 5:45)’ 일반 은총적인 사랑에는 제한이 없다. 흔히 ‘하나님 사랑에 차별이 없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 사랑’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면, ‘왜 모든 인류는 다 구원받지 못하는가’,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류를 구원시키기에 역부족인가’ 라는 질문이 생기게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는 ‘선택(choice)과 유기(reprobation)’에 근거한 이런 하나님의 편애(偏愛)는 ‘사랑의 하나님’과 모순되는 차별적 교리라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오늘날 가정, 학교, 직장 내에서 편애로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런 차별적 사랑을 하실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혹 불완전한 인간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하신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리브가(Rebekah)가 차자(次子) ‘야곱’을 편애하고(창 27:5-17), 아브라함이 차자 이삭을 편애하므로 야기된 가정불화들을 기록해서 오늘 우리에게 편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말한다.

일리 있어 보이나, 오히려 정반대다. 불완전한 인간은 편애(偏愛)해서는 안 되지만 영원한 지혜로 행하시는 하나님께는 그것이 가능하며, 또한 그것이 그의 구원 경륜의 한 방편임도 알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애를 정당시하고 또 그러한 내용들을 성경에 많이 기록하셨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신 것(창 4:4-5) 때문에, 이를 질투하여 형(兄)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가인의 제사를 용납하지 않은 것은 편애 때문이 아니라 가인의 잘못된 제사 때문이었지만, 영적인 고려 없이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보일 수 도 있다. 어떻튼 그 일로 형제 사이에 엄청난 불행이 야기됐던 것은 분명하다.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다툼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그의 생모 ‘하갈’을 집에서 쫓아낸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코치한 결과이다(창 21:10-14).

오늘날 인류사적(人類史的) 불화로 일컬어지는 ‘아랍(Arab)’과 ‘이스라엘(Israel)’의 분쟁의 시초가 바로 하나님에 편애에 의해 사주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뚜렷이 구분 지으며, 편 가르기를 하신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느니라(암 3:2)”,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사 43:1)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20)”,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구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인 ‘믿음’ 역시, 구원 얻을 택자에게만 주어진 제한적인 은혜임을 성경은 말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사람이 믿느냐 안 믿느냐 역시 그의 자의적인 결단 여부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사랑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결과물이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말했듯, 사람들이 안 믿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유기(reprobation, 遺棄)하려고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 깨닫지 못하도록 한 때문이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하나님의 미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로 구분짓는 것을 넘어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로 가르며,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편애(偏愛) 성향을 드러내신다. ‘사랑하지 않음’이 단지 ‘무관심’이나 ‘방관’의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미움’을 담지한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3)”.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반대가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라 ‘미움’ 임을 알게 된다. 그것도 보통의 미움이 아닌 적대적으로 원수시하는 미움이다. 이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원수 관계로 규정하며, 우리가 애송하는 찬양의 노랫말들에도 그런 내용이 빈번히 등장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 1:21)”,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우리 원수같이 대적하나 사랑하여 주네(찬송가 416)”.

칼빈(John Calvin)이 ‘선택(choice)과 유기(reprobation)’라는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을 말했을 때, 유기는 소극적인 의미의 단순한 ‘버림(abandonment)’보다는 ‘저주’로서의 “지옥의 영벌(살후 1:8-9)”을 의미했다. 하나님이 원수처럼 미워하지 않고서야, 그들을 지옥에 유기하실 리 없다.

‘애굽을 그의 백성의 속량물(贖良物)로, 구스와 스바를 그들 대신으로 내어 주시는(사 43:3)’ 하나님의 경륜에서도, 사랑하는 자를 위하시는 그의 ‘애정’과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그의 ‘미움’이 어떤 것인지가 읽혀진다.

끝으로 ‘하나님 사랑’은 근본 ‘편애적(偏愛的)’ 일 뿐더러 ‘상대적(相對的)’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조건적’이라는 말이 아닌 그것의 상대개념에 의해서만 개념이 규정된다는 뜻이다).

이는 아담이 범죄 후 ‘선악(善惡)을 알게 됐다(창 3:22)’고 했을 때, ‘악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선’을, ‘선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악’을 의미한 것에서 시사받을 수 있다.

하나님에게 있어 ‘사랑’과 ‘미움’ 역시 상대 개념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상대화될 수 있음을 상정(presupposition)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불변하신 하나님께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이 그의 공의(公義)의 발현(發現)인 의분(義憤, 미움)의 상대 개념으로 나타나고, 의분(義憤, 미움) 역시 ‘하나님 사랑’의 상대 개념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사랑을 상대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 자체를 불경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신성화하려고 상대화가 불가한, 절대적인(형이상학적인) 개념을 그것에 입히려다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전락시킨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절대적인 고립적 개념(isolated conception) 곧, ‘사랑으로만 사랑을 아는’ 사랑 개념을 가질 수 없다. 곧 미움, 저주, 심판 같은 상대적 개념을 통해서만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불의’와 ‘악’을 모르고서는 ‘의’와 ‘선’을 알 수 없고, ‘어둠’을 모르고서는 ‘밝음’을 알 수 없고, ‘심판’을 모르고서는 ‘구원’을 알 수 없고, ‘율법’을 모르고서는 ‘복음’을 알 수 없고(갈 3:24), ‘지옥’을 모르고서는 ‘천국’을 알 수 없는 우리의 한계 때문이다.

사랑의 반대 개념인 미움이 있기에 사랑이 사랑 되고, 미움이 만연한 세상에서 사랑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모른다면 그의 ‘구원 사랑’도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구원 사랑’은 저주받아 마땅한 나 같은 인간이 구원받았다는 인식을 통해 그 의미가 더욱 고양된다.

‘유기자(遺棄者)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통해서만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이 드러나고, 유기자에 대한 저주가 클수록 택자의 ‘구원 사랑’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불의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서는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저주’에 내어줌으로 우리에 대한 ‘구원사랑’을 이루신 것에서, ‘미움’과 ‘사랑’이 극적인 매치를 이룬다. 아들을 저주에 내어 준 것에서보다 택자에 대한 구원 사랑을 극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심과 그의 주권에 기원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절대 사랑이 아닌 상대적 사랑이다. 그는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한 ‘유기자(遺棄者)’에 대한 미움과 심판을 통해 ‘택자(擇者)’에 대한 그의 사랑을 돋보여낸다.

그 결과 택자들로 하여금 당신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경외와 감사를 일으키신다. 만일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구원했다면 그는 오늘처럼 택자들로부터 감사와 찬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 하나님의 지혜여!

그런데 감사를 일으킬 이 ‘선택, 유기’ 교리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불평거리가 되고 있다. 정작 유기당한 불택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구원받은 그들은 ‘왜 불공평하게 자신들만 구원하고 다른 사람은 버렸냐’고 따진다. 어불성설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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