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근 목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람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라는 두 가지 언어를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방언’이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외국어 방언의 은사로서, 내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갑자기 말하는 것이다. ‘천사의 말’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으로,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영적 언어’이다. 이 영의 소리를 ‘천사의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전자는 인설방언(人說方言), 후자를 신설방언(神說方言)이라고 한다. 인설방언에 대해서는 앞에올린 글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제 신설방언의 은사에 관해 살펴보자.

기도의 초자연적 은사

천사의 말, 곧 신설방언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기도이므로, 이것을 보통 ‘방언기도’(prayer tongue)라고 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의 영이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그러므로 신설방언은 기도의 초자연적 은사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3).

성령과 내 영이 듀엣(Duet)을 이루어 하는 기도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영접하면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나의 영 안에 오신다. 그리하여 신자의 영은 ‘거듭난’ 영이 되는 것이다(요 3:4~6). 구원 받은 신자는 누구나 자기 영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전 3:16). 따라서 신자들이 영으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과 사람의 영, 두 영이 듀엣(Duet)을 이루어 함께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바울 자신도 그러하였지만(고전 14:18), 영적으로 빨리 자라며 그들의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도 잘 맺고 또 성령의 권능도 받는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높인다고 교훈했던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나의 개인적 유익을 위한 은사

‘덕을 세우고’ 라는 말은 헬라어로 ‘집을 짓다’는 뜻이다. 유다서 20절에서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이 성구에서 우리말 성경이 ‘건축’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헬라어로 ‘집을 짓다’는 말이다. 자기의 덕을 쌓는다는 것도 일종의 건설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방언이 그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를 건축하며’ 라는 말씀 바로 다음에 기록된 ‘성령으로 기도하며’ 라는 말씀으로 인해 재확인 된다. ‘성령으로 기도하며’ 라는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Pray in the Holy Spirit)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란 방언기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일은 ‘영으로’ 기도하는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방언기도를 규칙적으로 하는 신자는 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굳센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울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모든 은사들은 남을 섬기기 위한 은사이지만 방언의 은사만큼은 예외로 나의 덕을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성령의 탄식

방언기도는 나의 영이 하는 기도이다. 그런데 거듭난 신자는 내 영 안에 성령이 계신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바처럼 방언기도는 나의 영과 하나님의 성령, 두 영이 듀엣을 이루어 함께 기도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시는 놀라운 혜택을 받는다.

롬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성령 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안타깝게도 내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지적 연약함이 있다.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의 그 한계와 부족함을 도와주신다. 어떻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나를 위해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심으로써 도와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바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이다.

P.C 넬슨은 헬라어 문자 그대로 “성령께서 우리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라고 말한다(정확히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그는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를 기도할 때 우리의 입술을 통해 신음이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인도를 받아)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기도는 성령과 나의 영, 두 영이 듀엣을 이루어 함께 하는 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면 그때는 ‘영으로’ 기도하라. 그때에 내 영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나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인가!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하지 않는 한 성령님이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해주시는 영적 혜택을 맛볼 수 없다. 성령은 내 영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나와 분리되어 탄식하며 방언을 말할지 않는다. 그분의 탄식은 나의 내부로부터 나의 입술을 통해 빠져 나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돕는 자’로 보내지셨다. 성령님이 나의 기도생활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돕기 위해 내 영 안에 와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시는 기도를 힘입고자 한다면 반드시 내 입을 열고서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성령 안에서(in the Holy Spirit)하는 기도이다.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도 언제나 기도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 아니시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서 나를 위해 항상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나를 위한 성령님의 기도사역은 그렇게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실 때는 내가 영으로, 곧 방언으로 기도할 때이다. 그분이 맡으신 사역은 대제사장 사역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시며 위로하시고 도와주시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깊은 기도의 은혜를 누리려면 방언기도를 함으로써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간구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강조되어야 할 더 깊은 기도의 수단

우리 인간은 큰 기쁨을 맛볼 때나, 깊은 슬픔을 당할 때나 말문이 막힐 때가 허다하다. 그때에 방언기도는 이 한계선을 뛰어 넘어 내 마음의 상태를 능히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게 해 준다. 그리하여 방언기도는 더욱 깊은 기도의 찬양의 수단이 된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a)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유석근 목사(알이랑교회)

* 경기도 부천에 있는 알이랑교회의 담임목사로 성경에 계시된 한민족의 정체성과 구원사적 사명의 선포를 소명으로 삼고 있다.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을 출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