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누가 계승하느냐?"라고 하는 이야기와 그리고 "다윗 왕조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그 왕조를 잘 지켜 갈 것인가?"라고 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시작한다. 일종, 한 왕조를 지켜 가는 <囚汚>에 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다윗 왕위 계승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설화 문학"이라는 형태를 띄고 왕궁설화 문학권 속으로 들어와 있는 하나의 설화문학이다. 이 궁정설화문학은 일종 지혜문학의 발전의 한 열매이며 이러한 지혜문학의 발달은 곧바로 솔로몬의 중요업적에 속한다고 하겠다.

다윗 왕위계승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이교의 제국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심각한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을 통하여 들을 수 있다. 다윗의 첫 아들, 암논의 그의 이복누이 동생 다말을 강간한 이야기,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에게 행한 보복살해 이야기,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그의 부왕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이야기, 그리고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그의 부왕의 왕위를 노리고 솔로몬과 왕위다툼을 하다가 솔로몬에 의하여 처형당한 이야기 등등은 세속 왕권사회의 내적 갈등과 비극을 여실히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왕궁 이야기는 더 고대의 역사설화문학인 이스라엘 선조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등)에 관한 설화문학과는 비록 그 문학적 성질에 있어서는 많은 유사한 점을 갖고 있었으나 그 종교적 성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그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직접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啓示)해 보이시는 "조상들에 관한 역사설화"에서와는 달리, 여기 왕궁 역사설화에서는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역사의 "배후에서"(!) 섭리(攝理)하시는 것으로 기술(記述)되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활동도 여기 왕궁설화에서는 훨씬 더 "자유로운 인간적 관점"에서 기술(記述)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으로부터 많은 지적 문물을 이끌어 들임으로써 인간문화의 꽃을 꽃피우게 하였던 첫 번째 왕이었다고 하겠다. 이 때, 끌어들인 문물은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 속하는 목록문학(目錄文學)들이었다. 동물이나 초목에 관한 많은 목록(目錄)이 왕궁의 교육기관을 통하여 수용되고 교육되었다. 즉 지적 유산이 갑자기 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왕궁을 통하여서는 단순한 "목록" 만이 수집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잠언과 노래의 형식으로 신학적으로 전용(轉用)되었고(3000 잠언과 1005편의 노래 저작),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에 관한 여러 가지 종교적 규범들로 승화 발전됨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적(知的) 상황을 세계적 관점으로 승화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지혜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을 세계적 관점으로 끌어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윗 왕위를 이어 받자 이 거대한 제국을 어떻게 잘 관리하며 어떻게 잘 이끌어 갈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고민하였던 것이다.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 꿇고 이 거대 왕국을 통치할 "지혜"를 구하였을 때의 솔로몬은 신명기 사가의 눈으로 볼 때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성군이었다.

그는 기브온 산당에서 꿈을 꾸었고 그 꿈 속에서 야훼 하나님께 수(壽)도, 부(富)도, 원수에 대한 복수(復讐)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지혜로운 마음> 만을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여기서 솔로몬이 간구한 <지혜로운 마음>은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서 보면, 문자적으로는, <듣는 마음>(렙. 쇼메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의 소리에 겸손히 경청하는 자세가 최대 최고 최선의 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무서워할 줄 아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알았던 것이다.

솔로몬의 출발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훌륭하였다. 이러한 솔로몬의 지혜는 저 유명한 명 재판의 지혜를 최고 최선의 판례(判例)남겨 놓게 하였던 것이다. 즉 갖 태어난 살아 있는 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창녀가 서로 그 아기가 자기가 낳은 아기라고 하며 자기가 친 생모라고 주장하는 법정 논쟁에서 솔로몬은 기원전 1000년경의 고대에서는 신(神) 만이 판단할 수 있는 판결을 내려서 진짜 생모(生母)를 가려내는 신화적(神話的) 판례(判例)를 남긴 바가 있는데, 이 판결의 지혜는, 전적으로, 낮고 천한 저 창녀들의 울부짖음도 또한 진지하게 경청(傾聽)하고 그 울부짖음 속에 들어 있는 신(神)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렙. 쇼메아: 왕상 3:9)을 가진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이른 바 "신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듣는 마음>의 추구"가 결실(結實)로 나타난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성전 건축>의 대 역사(役事)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수도를 정치의 중심지로만 삼지 않고 신(神)의 뜻을 묻고 대답하는, 이른 바, 하나님의 지혜를 듣는 장소로 삼기 위하여 법궤를 이동시켜 예루살렘에 안치시키므로 예루살렘을 신정정치(theocracy)의 센타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으로 삼았던 다윗의 신정주의(神政主義)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었다. 성전건축과 성전제의(聖殿祭儀)를 통한 신정정치의 수립은 최고 최대 최선의 이스라엘 정체성 확립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적(知的) 유산이 늘어나면서 전대미문의 부강한 나라를 이룩한 솔로몬은 너무도 찬란한 왕권의 영광속에 안주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과오를 범하기 시작하였다. 국권의 확대, 국제적 지위의 향상, 새로운 문물의 증대, 하나님의 전(성전)보다 더 호화로운 왕궁건축, 왕권의 확대 등등에 따라 백성들의 소리에 귀기울여야하는 <듣는 마음>의 지혜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대표적 예를 신명기적 역사가는 아름다운 많은 외국 공주들을 솔로몬 왕의 후궁으로 유입하면서 이스라엘 야훼주의의 열정이 식어진 사실에서 찾았다.

외국과의 통상외교와 정치외교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 신명기적 사가의 본래적 정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만 방자하여 <듣는 마음>의 지혜를 상실한 것이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여인이 들어오는 것은 결코 그 여인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 여인과 함께 그 여인의 이념과 종교가 함께 들어온다는 것이 문제다.

외국의 공주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교(異敎) 신앙(信仰)의 전도자들이었다. 백성들을 착취하여 권력자들의 배를 불리는 것과 이러한 제국주의적 신앙을 변호하는 이방 종교의 지배 이데올로기 수용, 이것은 이교 여인들의 수용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마침내 이스라엘 땅에는 이방신들을 위한 성소들이 늘어나고 백성들의 강제노역을 통한 호화로운 왕궁건축이 강행되는 불행한 사태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여로보암의 반역은 이러한 솔로몬 말기의 정신적/종교적 위기의 한 산물이며 르호보암의 <듣는 마음>의 상실은 남북왕조의 분열을 가져 온 그 원흉이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의 실각은 이 <듣는 마음>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김이곤 교수(한신대 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