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가장 재능 있는 식물 화가
베일에 가려진 예술가이자 탐험가
자연을 하나님 만드신 작품 여겨
자연에서 하나님 찾아볼 수 있어

르 모웬
▲르 모웬의 곤충, 식물그림, 종이 위에 수채와 잉크, 분필, 16.4x19.3cm.
16세기 ‘가장 재능 있는 식물 화가’로 불리며 예술가이자 탐험가로 살았던 자크 르 모웬 르 모르그(Jacques Le Moyne de Morgues,1533-1588)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일에 가려져 있던 화가였다. 미술과 자연사 분야에 대한 그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르 모웬의 존재는 미술사에서 수세기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에는 『라 클레 데 샹』(La clef des Champs)으로 불리는 꽃그림집(Florilegium)이 있는데 원작자가 르 모웬이라는 사실이 공개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1922년 스펜서 새비지(Spencer Savage)가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던 중 식물 중심으로 꾸며진 수채화 앨범이 르 모웬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림 하단의 서명 ‘드 모르그(demorrgues)’가 모르그 출신의 ‘자크 르 모웬’임을 밝힌 것이다. 하마터면 잊혀질 뻔 했던 그림이 되살아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르 모웬은 어떤 화가였을까? 그는 샤를 9세의 지시로 르네 굴레인 드 로도니에르(René Goulaine de Laudonnière)가 이끄는 북아메리카 원정대의 수행 화가로 참여했으며, 플로리다의 식물, 동물,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기록한 민속지학(ethnography, 인간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정성적·정량적 조사기법을 사용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술하여 연구하는 학문) 드로잉을 제작했다. 특히 플로리다 인근 토착 동식물을 사생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미 대륙 초기 유럽 묘사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원정을 끝내고 프랑스에 돌아왔지만 르 모웬의 신앙, 즉 그가 프로테스탄트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역시 가톨릭의 종교탄압을 피해가지 못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위그노 박해가 극심해지자 그는 영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금속공예가, 판화가, 건축가, 엔지니어, 화가 등 전문직 종사자가 영국으로 도피하였으며, 이들은 영국에서 예술을 가르쳤고 책의 삽화를 담당하였다.

프랑스에서 훈련받은 예술가들은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우수한 기술로 환영받았다. 더욱이 당시 영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위그노 신자들은 정직함과 근면, 탁월한 솜씨로 평판이 좋아, 커다란 반발 없이 영국 사회에 동화될 수 있었다. 모웬은 영국의 탐험가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의 일을 도왔고, 버지니아로의 탐험에 고용된 예술가 존 화이트(John White), 위그노 판화가 테오도르 드 브뤼(Theodor de Bry)와 교류하였다.

르 모웬
▲르 모웬, 클로브 핑크와 메리 골드, 1575년경, 빅토리아 앤 앨버트미술관 소장.
영국에 있는 동안 르 모웬은 미국 남동부 동식물군에 대한 수채화 시리즈와 삽화 등을 꾸준히 제작하였다. 이때 꽃그림은 곤충과 식물, 과일 등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르 모웬이 꽃그림에 몰두하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시 해양무역과 식민지 개척이 활발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멀리 떨어진 나라의 희귀하고 이국적인 식물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는 탐험의 증가로 유럽에 세계 각지의 토종 식물들이 선보였고, 정원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였다. 점증하는 관심에 따라 이국적인 식물의 수집가들과 학자들 사이에서도 예술가들이 꽃과 식물을 기록해야 한다는 요구가 비등해졌다.

르 모웬은 지도와 필사본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 도시 디프에서 기량을 익혔기에 꽃그림에 특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르 모웬이 꽃그림집을 착수한 배경에는 이 같은 시대적·문화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 배경보다 좀 더 실질적이다. 이는 위그노 신자로서 그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브리티시 미술관(British Museum)에 소장된 꽃그림집에는 소네트와 59점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화가로서는 기량이 무르익을 40대에 제작한 것이며, 르 모웬의 꽃그림집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섬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 있는 꽃그림집과 달리, 브리티시 뮤지엄의 소장품은 앨범 출발을 소네트(sonnet)로 시작하고 있다. 소네트의 구절은 꽃그림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피조물들을 애정의 눈길로 바라볼 때 확실한 논거를 제공해 줍니다./ 오! 그 분의 성호를 영원히 송축하며 찬송합시다. 그 분이 땅과 궁창의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 무엇보다 그 분은 머리를 높이 만드셔서/ 매일 아침 새 빛이 들어오는 것과 대지의 가슴을 온갖 꽃으로 장식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 풀이나 곡식, 파리는 없으며, 어떤 미미한 꽃이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색으로 봄이 오리라는 것을 약속합니다.”(Paul Hulton, The Work of Jacques Le Moyne, 1977)

기독교 신앙인으로 성장한 르 모웬의 신앙심은 그의 예술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가로서 그가 듣고 배웠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땅과 궁창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이었다.

르 모웬
▲르 모웬, 꽃그림집의 소네트.
르 모웬에게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고 피조물이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우리들이 보는 눈앞에 천지의 조직을 펼쳐놓으셨다”(칼뱅, 『창세기 주석』 )는 사실에 기인한다.

르 모웬은 칼뱅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로 인식했으며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그 분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는 네덜란드의 꽃그림을 만개시키는 데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미술사학자 김소연은 꽃그림의 대표적 화가 자크 그 헤인(Jacques de Geheyn)과 크리스페인 드 파스(Crispijn de Passe)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꽃그림의 시원을 르 모웬의 영향에서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는데, 두 화가가 모두 르 모웬으로부터 “꽃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재현하는 것과 꽃그림을 독립적인 그림범주로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였다.

르 모웬 연구가인 폴 헐튼(Paul Hulton)은 그의 수채화에 대해 “그림들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식물들로 되어 있다. … 그것들은 디테일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지만,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식물학자들의 과학적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식물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덕들의 조합은 르 모웬이 살았던 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생애는 큰 고비의 연속이었다. 신대륙에서 겪은 절체절명의 순간, 바돌로메 날의 위그노 대학살, 영국 런던으로의 탈출 등 위기를 맞이하면서도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여기며 성실히 감당하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선포하는 것 같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다. 그 분이 하시는 일! … 이토록 선한 일을 하시는 분과 견줄 수 있는 이 누구인가?”(성 오프렘의 시중에서)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