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재감리교회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2대, 4대, 10대 담임, 1869~1942) 등을 배출한 꽃재감리교회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관 ‘광복 76주년 한국 기독교 광복절 기념예배’가 15일(주일) 오후 3시 꽃재교회(담임 김성복 목사)에서 열렸다.

기념예배에는 주요 교단 교단장 및 협력기관장들이 참석하고, 현재 4단계로 상향된 코로나19 대비 방역수칙에 따라 최소한의 인원이 모인 가운데 CTS기독교TV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한국 기독교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1945년 8·15 광복절이 일제 식민통치의 종말과 독립된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렸듯, 이번 광복절 기념예배를 통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했다.

예배 장소로 선정된 꽃재감리교회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일로에 있을 당시부터 인원이 축소된 대면예배와 겸하여 실시간 스트리밍 예배 및 새벽기도회를 드렸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위축되지 않도록 비대면 예배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개체 교회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대한제국 말기 1905년 꽃재 언덕에 세워졌다 하여 그 당시 꽃재교회(구 왕십리교회)라 불렸다. 이름처럼 민족의 운명과 함께 흩날리면서도 꺾이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 꽃재교회의 목회자들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꽃재교회의 2대, 4대, 10대 담임이었던 이필주 목사(1869~1942). 그는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3·1운동 사전계획에 깊숙이 가담했고, 감리교회 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체포돼 2년여간 옥중 생활을 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독립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석방된 후에도 담임목사로서 목회사역에 전념하면서도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신사참배 강요와 탄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과 민족적 절개를 지킨 교회와 민족의 영적 지도자였다.

이필주 목사
▲꽃재교회 2대, 4대, 10대 담임목사였던 이필주 목사(1869~1942).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3·1운동 사전계획에 깊숙이 가담했고, 감리교회 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체포돼 2년여간 옥중 생활을 했다.
꽃재교회 14대 담임(1941~1945) 이규갑 목사(1888~1970)는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 충남 홍주 의병에 참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 1938년 기독교 탄압으로 평양감옥에 수감되는 등 36차례나 검거되면서도, 창씨개명, 예배 때 일본어 사용, 일제사관, 국기배례와 궁성요배, 국민서사낭독을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준비사업을 돕고, 1946년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친일파 지도자와 대결했으며, 남산교회를 설립하는 등 교회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꽃재교회에서는 풍전등화와 같은 교회와 민족의 운명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사명을 다한 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2017, 2018년에 교회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