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귀스타프 도레의 <돈키호테> 삽화.
‘이성(理性)’은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이지만, 라틴어로는 비례나 균형을 뜻하는 ‘라티오(ratio)’란 뜻이 있다. 이성은 우리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보도록 도와준다. 이에 반하는 ‘오해(誤解)’란 사물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편향되게 보게 하는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문제와 사건과 불행을 낳는 주범인 이 ‘오해’란 과연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대답은 우리의 무지나 선입견 혹은 감정의 불안정 때문이다. 사실적 의미나 사실적 사건을 모르거나 왜곡하는데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순수한 오해는 이해를 만나면 화해가 된다. 그러나 독선이나 감정이 앞선 나머지 이성이 마비될 때는 우리도 모르게 굳은 오해가 생겨난다. 이런 오해는 애당초 이해를 배제한 오해이기 때문에 ‘눈먼 오해’라 부를만 하다.

‘눈먼 오해’는 ‘이성의 아나키즘’이나 ‘돈키호테적 이성’이라 표현하고 싶다. ‘아나키즘’이란 기존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무질서’나 ‘혼란’의 의미로 여러 분야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용어이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다양성에 대해 경이를 느낄 때가 많다. 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저항은 전후 문맥(context)을 떠나 부분적으로 얼토당토않은 적용을 하는 경우를 만날 때처럼 매우 망연자실하고 곤혹스러움을 느끼게도 한다.

예를 들면, 두부를 ‘밭의 고기’라고 하는 것은 두부의 높은 영양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밭에서 나는 것은 채소나 곡류뿐인데 고기가 난다니, 아닌 것은 아니다!” 하고 누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항의를 해온다면 대경실색(大驚失色)할 일이 아닌가?

스페인이 낳은 최고의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불후의 명작인 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 속에는 자기 신념에 빠진 주인공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거인인 줄 알고 창을 앞세우고 돌격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정의의 전투, 곧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악의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봉사인 것이라 믿고 있는 돈키호테에게는 풍차가 멸망시켜야 할 악의 화신들로 보인 것이다.

돈키호테는 너무도 굳은 자기 신념으로 말미암아 말리는 하인 산초의 말도 듣지 않고, 풍차에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도 하려 하지 않았지만, 공격 전 기도만큼은 두손 모아 비장한 각오로 올렸던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 속의 자기 몰입적 사고가 가져오는 인생의 우여곡절한 스토리들에 대한 신랄하고도 해학적인 풍자이기도 하지만, 신앙인인 우리에게는 선악의 이원론적 사고가 가져다주는 모순과 폐해에 대한 교훈이기도 하다.

대개 돈키호테식 오해는 자신의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을 때 많이 일어나는데, 자기 이론이나 선입견이 강하고 감정이 상해 있을 때일수록 심각도가 커진다. 또 자의식이 극대화될 때도 이런 오해가 벌어질 수 있다.

순수한 오해든 눈먼 오해든, 대개 오해는 심각한 불화와 불행을 낳는다. 그러면 이것을 방지할 방법은 무엇인가? 인간관계에서의 오해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 채찍이요 인간 막대기일 수있다.

그러므로 오해를 받을 때는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것이 가장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영적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다. 또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한편 오해를 하는 자는 자기 속에 돈키호테식 신념이 없는가를 진단해 보아야 한다. 나의 신앙의 명분을 위하여 정작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을 도리어 돈키호테가 부리는 말, 로시난테(Rosinante)에게처럼 마구 채찍질하고 도리어 상처 투성이로 만들어 드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인류 역사상 오해로 인한 인류 최대 비극의 전형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한 사건이다. 왜 이런 오해가 일어났는가? 인간의 무지와 독선과 편견,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당시 주님의 물음에 온전히 답한 자는 베드로 외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고, 예수는 평범한 자기 고향사람이요 자기 집안 사람일 뿐이라는 선입관(마 13:57)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물으시는 이 물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아는가?
우리에게 주님을 아는데 방해되는 독선은 없는가?

혹 우리는 자주 이분법적인 정죄의 영에 사로잡혀 사물을 굴절된 시각으로 오독하고 오판하지는 않는가?
성령의 이름을 빙자해 시도 때도 없이 향방없는 ‘베드로의 검’을 뽑아들고 있지는 않는가?

은밀히 기도하는 대신 ‘기도해 주자’는 말을 상대에 대한 분풀이나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수단으로 삼은 죄는 없는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님께 입을 맞추는 유다가 우리 속에는 없는가?
우리 속에 있는 ‘견고한 진’은 무엇인가?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린도후서 10장 3-5절)”

우리 안에 있는 돈키호테식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가 될 수 있다. 주여,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우리 속의 모든 생각이 다만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