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John Owen, 1616-1683)
▲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위키백과
제1장 서론

본 연구는 교회공동체의 두 가지의 정황을 염두에 두고,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탐구한다.

첫째, 성도들이 개인 내면의 ‘영성’을 무시한 채, 외면의 ‘행위’에만 치우치는 경향이다. 오웬은 이를 사람들이 악마적 생각으로 사단의 속임수를 사용하거나, 더러운 열심을 가지고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위장하는 상태라 하였다. 둘째, 성도들이 ‘성령의 사역’을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매체나 개인의 역량을 더 신뢰하며 수집된 정보로 얻은 ‘성과’에 만족하는 경향이다.

이는 ‘빅데이터(Bigdata)와 ‘인공지능(AI)’ 등에 의존하여,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에서 시작되는 영적인 과정을 건너뛰려는 경향으로,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신학연구 분야를 넘어 인격과 경건함이 담겨야 하는 설교의 영역까지도 엿보고 있다. 또한, 내면의 ‘생각’을 무시하고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넘치는 정보들은 결정 장애를 일으키게 하였고, ‘신앙 행위’로 만족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성도들이 ‘성과’에 치중하여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영적 행위’가 영적 진정성과 공동체의 유익을 상실하게 하는 역설적인 상항이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본 연구자는 존 오웬이 개진한 ‘성령론’이 ‘영성’을 정립하는 주요한 주제로서 함의를 지닌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성령의 사역’(Ministry of the Holy Spirit)과 함께 성도의 ‘영성’(Spirituality)을 주의 깊게 탐구하였던 청교도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주도적이며 개별적’(the initiative and interpersonal)7)인 ‘성령의 사역’에 이끌리는 성도 내면의 ‘영성’과 외면으로 드러나는 ‘신앙 행위’를 주요하게 인식하였다. 특히, 오웬은 성도들 나름의 ‘영성’이 그들의 내면과 외면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양상을 관찰하였고, 이를 ‘성령의 사역’이라는 근본적 틀 속에서 논하였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는 성도의 ‘영성’를 단계적으로 점검하여 정진할 수 있는 첩경이기도 하다.

2장 본론

오웬은 꾸며진 ‘영적 행위’를 드러내는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어떤‘영’을 따르는가를 관찰해야 한다고 하며, 특히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사람은 성령이 증언한다(롬 8:5~17)고 하였다.8) 이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영성’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도, 개인의 내면에서부터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행위’에 고유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러한 실례는,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질책하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영적 행위’는 영적인 모양을 갖추었으나, 실제는 ‘하나님 영’이 부재한 상태에서 꾸며진 ‘행위’이었다(마 23:26).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오웬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성령의 사역’이 ‘행위’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하였고, 성령의 사역이 ‘영성’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논설하였다. ‘성령의 사역’에 관한 오웬의 신학적 견해는 당시 영국 청교도들의 ‘영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영성’을 확고히 하는 지침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오웬의 사상은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고 외면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균형성을 강조한다.

오웬의 ‘영성’에 관한 논의는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Spiritual-mindedness in the Affections)와 ‘영의 생각’(Minding of the Spirit)과 ‘영적 관계’(Relationship of the Spirit) 그리고 ‘영적 행위’(Duties of Divine Worship)를 ‘성령의 사역’으로 관통하며 이해하는 것으로 본연구의 틀이다.

첫째, 오웬의 ‘영성’은 성도가 성령의 뜻대로(고전 12:11)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어 영적 생활 원리(엡 2:10)를 따르는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Spiritual-mindedness in the Affections)에서 시작한다. 오웬은 사람들이 본질에서부터 죄의 지배를 받아 스스로 ‘하나님 영’에 관한 생각이나 ‘영적인 일’을 멀리하려고 한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는 주도적인 성령의 역사가 성도 내면에서 단회적이며 완전하게 일어난 이후에도 성령의 개별적인 사역이 필요한 현상이다. 즉 성도는 내면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한 후 성령의 개별적인 역사로 성화의 과정을 지나게 된다.

오웬에 의하면, 사람들이 소유한 마음에는 개인적인 성향이 시작하는 하나의 자리가 있는데, 바로 그곳은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는 자리라 하였다. 오웬이 성도의 마음에 주도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논할 때 주요한 표현 중 하나가 ‘영적 마음가짐’(Spiritual-mindedness)과 함께 사용된 ‘정서’(Affection)이다. 오웬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의 자리를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라 한다. 그는 바울이 말한 ‘프로네마’(φρονημα)를 지성적 ‘생각’ 이전의 더 근본적인 ‘마음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롬 8:6).

이곳은 마음의 고정된 공간이나 마음의 한 곳으로 볼 수도 있다. 오웬은 이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Spiritual-mindedness’와 ‘Affections’라는 말을 교차적으로 혹은 함께 사용하였다. 이 논의에서 오웬이 말한 ‘정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Affection’(감정 혹은 정서) 개념과 유사하다. 에드워즈는 그의 글에서 Emotion(감동; 감정)보다 Affection(감정; 정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베드로서를 주해하며 ‘참된 신앙이 주로 거룩한 감정(Affection) 안에 있다’라고 하였다.이러한 견해는 감정을 참된 신앙이 시작되는 곳으로 본 것이다. 물론, 이는 오웬의 견해와 똑같지 않으나 정서를 공간적인 개념으로 본 것이다.

한편, 오웬은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면 일어나는 변화에도 주목하였다. 이는 ‘성령의 사역’으로 성도가 성령의 뜻대로(고전 12:11)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영적 생활 원리(엡 2:10)를 따른다는 것이다. 오웬은 네 가지의 영적 생활원리를 제시하였다.

첫째, 하나님께서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들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경멸하셨다(요일 2:15). 둘째,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짧게 하시므로 세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게 하셨다(시 39:5, 6).

셋째, 하나님께서 세상에 속한 것들의 위험을 알리셨다(요일 2:16).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혜를 따라 주어진 것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하셨다(마 25:34). 이러한 상황은 성화의 과정으로 개인의 고유한 영성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오웬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 때문에 때로는 성도의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도 ‘은혜’와 ‘죄’가 투쟁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세상’은 큰 야심을 가지고 모든 술책으로 성도의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를 계속해서 유혹하나, 은혜의 성령은 지키려 한다. 이런 상반된 상황에서 성도의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도 ‘세상 영’과 ‘하나님 영’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오웬은 하나님의 영을 믿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요일 1:10)에게 성경을 연구하여 세상 영으로부터 진리를 파수하며, 여호와와 바알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왕상 18:21).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의 존재를 개인에 따라 인식하기도 하고,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는 마치 큰 배의 방향타(the helm)와 같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자리하며 나름의 방향을 정해주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오웬은 성도에게서 영적 영향력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를 생명수가 흐르기 시작한 ‘고유한 샘’과 같은 곳이라 하였다. 이는 성도의 마음에서 사역하는 고유한 ‘성령’이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영성’의 향방을 정하는 것이다. 이 논의는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주도적인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과 이 사역을 통해 ‘영성’이 발현된다는 사실은 공통된 ‘객관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오웬은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 시작하는 성령이 객관적인 사역을 영적인 것들에 대한 분별로 설명하였다. 성도들은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주어진 상황을 분별하며(cleave), 이 분별로 그에 어울리는 합당한 집착(adherence)을 한다. 이는 성도들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어떤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모양이나 그에 따라 그가 집착하는 대상은 서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분별과 집착에 대한 근거와 이유는 모두에게 같다. 물론 그 근거와 이유를 오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는 주권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보았다.이때 하나님 영은 주권적으로 임하므로 사람이 떠나거나 피할 수가 없다(시 139:7) 반면,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 개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과 이를 통해 영성이 드러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진다는 것은 ‘주관적’ 사실에 해당한다. 성령으로 새로워진 성도가 개별적인 성령의 사역을 따라 자기 나름의 고유한 품격과 자질과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성령의 주관성에 해당한다.

물론 이는 성령의 능력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개인에 따라서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 은혜로 임하는 성령의 주관적 사역이 다르며, 이 은혜에 반응하여 주어진 의무도 다르며, 또 드러내는 ‘영성’도 다르다는 것이다. 오웬은 이를 성령이 당신의 뜻 안에서 목적을 가지고 역사하며 만족한 은혜로 충족하게 역사하는 것으로 보았다.이때도 성도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어진 의무가 다르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개별적으로
다르게 적용되는, 즉 주관적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일면이다. 따라서 오웬은 개별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언급하며 성도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친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하지 못한 것은 성도가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호 10:2). 이는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성도가 ‘세상 영’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 영’을 따라 ‘영성’을 드러내기를 힘쓰라는 객관적인 명령이지만,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의무이기도 하다.

둘째, 오웬은 성도가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 이미 받은 영의 영향력을 따라 그에 합당한 ‘영의 생각’(Minding of the Spirit)을 한다는 ‘영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오웬은 ‘영의 생각’을 ‘육의 생각’과 비교하여 영의 본질보다는 드러나는 성향으로 구분하였다(롬 8:5, 6). 이 상황에서 주도적인 은혜로 임하는 ‘성령의 사역’은 이미 정해진 방향의 ‘생각’을 하도록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성도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영’의 지원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의 생각’은 주도적이며 개별적인 ‘성령의 사역’을 따르며 성도 나름의 고유한 성향으로 정립된다.

오웬의 견해에서 이렇게 정립된 ‘영의 생각’은 한 성도의 ‘영성’을 가늠하는 최선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이는 성도의 고유한 성향으로써 ‘영의 생각’은 개인의 실천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웬은 ‘성령의 사역’을 따라 정립되는 성도의 ‘영의 생각’이 세상 유혹을 분별하고, 믿음의 길을 찾는 이정표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였다. 물론, 개인에게 내밀하게 형성되는 고유한 성향에 어울리는 ‘생각’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을 때도 유효한 관계가 존재한다.

오웬은 ‘영의 생각’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며,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8)28)는 말씀을 논의의 토대로 삼았다. 이는 사람들이 ‘육신’의 지배를 따를 때는 ‘영의 생각’를 대적하지만, ‘하나님 영’의 지배를 따를 때는 ‘육의 생각과 대립한다는 기본 원리다(갈 5:17). 여기에서 ‘영의 생각’이라는 개념의 토대를 이루는 ‘영’과 ‘육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먼저, ‘영의 생각’에서 ‘영’은 영적 생명의 원리인 ‘성령’에 이끌리는 생각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 영’이 거하면”(롬 8:9);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다음으로, ‘육의 생각’에서 육신은 ‘세상 영’에 이끌리는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롬 8: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라는 말씀에서, ‘육’은 본질을 모든 악한 행동들로 드러내고, 타락한 본성은 사람 내면의 부패한 원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동’과 ‘서’가 다른 것처럼 근원부터 다르다. 따라서 영과 육은 한사람에게 같이 존재하고 있으나 그 특징이 서로 같이 나타날 수 없고, 서로 상대 개념을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도 없으며, 같은 방향으로 진행할 수도 없다(갈 5:17).32) 이러한 상황에서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반면 ‘육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롬 8:7). 여기서 ‘할 수도 없다’라는 것은 단순한 취사선택이 아니라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이다.33) 따라서 이미 주도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구별된 성도는 ‘하나님 영’에 의존하는 고유한 ‘영성’을 갖출 수밖에 없다. 곧, ‘세상 영’을 따르는 사람은 ‘육의 생각’으로 ‘하나님 영’을 거부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롬 8:7-8) ‘육의 성향’을 형성하여 드러내나, ‘하나님 영’을 따르는 성도는 ‘영의 생각’으로 ‘세상 영’을 거부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는 성도로서 내면에서부터 이미 형성된 ‘영의 성향’을 드러낸다.

위의 논의에서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 주도적인 ‘성령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므로 이미 영적 흐름의 방향이 정해진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의 생각’ 단계에 와서 ‘하나님 영’을 따르는 움직임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성도의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주도적인 은혜로 시작한 ‘성령의 사역’이 성도의 성향을 정하여 ‘영의 생각’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 영’이 사람의 생각을 장악하면,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 영’을 대적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는 성도의 ‘영의 생각’이 ‘세상 영’의 공격을 받아 ‘하나님 영’을 따르는 원동력을 상실한 상황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 영’을 따르는 성도의 ‘생각’도 ‘세상 영’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이는 성도가 ‘내면에 남아 있는 죄’를 이기지 못하여 ‘육의 생각’을 따르거나, 육체의 욕구를 따르며(롬 1:24-26) 개인의 욕심을 따라가기도 한다(엡 4:22).

오웬에게 있어서 ‘영의 생각’의 본질은 성도가 주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개별적으로 주어진 의무를 ‘성령의 사역’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가 삶에서 유혹을 당하기도 하나, 결과적으로 성도에게 임하는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한, ‘육의 생각’이나 ‘영의 생각’은 동시에 공존하며 서로 균형을 맞추거나, 함께 뒤섞일 수 없다(갈 5:17). 즉, 두 생각이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물론, 때로는 한 사람이 정반대의 행동들을 보일 수 있고, 또 나름의 행동이 시작된 생각의 경계나 자리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움직임이 일관성이 없거나, 구체적 행동의 상황이 모호한 것일 뿐, 서로 배타적인 두 생각이 서로 뒤엉켜서 함께 행동하거나 균형을 이루어 드러나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 오웬의 논의에서 한 개인이 움직이려는 그 순간에는 언제나 어느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로잡힌 생각은 주도권을 따라 움직인다. 그다음에는 일단 시작된 한 생각의 주도권이 그 영혼을 완전히 장악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지속하여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는 사람들이 삶의 정황에서 ‘영적인 것’이나 ‘육신 적인 것’ 어느 한쪽의 ‘영성’을 소유한다는 간접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오웬은 성도가 ‘성령의 사역’을 따라 생각하는 비율과 횟수와 시간에 따라서 ‘영의 생각’의 정도가 개인적으로 다르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타락한 사람의 본성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인 지원이 필요하고, 구별되어 거듭난 성도에게는 주어진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개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영과 육을 가로지르는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거나,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불확실성과 무관하게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 사이의 경계는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개별적으로 고유한 영적 관계를 유지하고 그에 따르는 성향의 행위를 행하게 하고 이는 습관화 되어 ‘영성’을 정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웬은 성도가 ‘성령의 사역’을 따라 구별된 ‘영의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을 따라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하나님 은혜 안에서 이루는 ‘영적 관계’라 한다. ‘영성’에서 관계를 이루는 습관에 관한 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와 ‘죄 죽임’으로 확대된다.

셋째, 오웬은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Relationship of the Spirit)로 ‘영성’의 과정을 논의하였다. 이 관계는 ‘교제’(엡 2:18)(Communion with The Triune God)와 ‘죄 죽임’(롬 8:13)(On the Mortification of Sin)을 습관적으로 행하며 더욱더 견고하게 된다. 오웬의 논의에서 습관은 성령의 사역을 따라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서 영적인 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성도가 영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영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영적 관계는 신령한 연합(요 17:21~23)으로 성령의 매는 줄로 하나(엡 4:3)를 이루는 상태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가지는 반복 된 습관이 아니라 성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절대적인 원리들이다. 그중에서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의 죄 죽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이루는 대표적인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일률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따르며 반복되는 습관성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오웬은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의 ‘죄 죽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정립하고 견고하게 유지하는 ‘영성’의 방도를 제시한 것이다.

성도의 ‘영적 관계’는 칭의 이후, 성화의 과정에서 ‘성령의 사역’을 따라 유지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때, ‘영적 관계’는 새로운 관계가 아니라, 주도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이미 맺어졌고 지속해서 유지되는 관계이다. 이러한 ‘영적 관계’는 성도의 칭의 이후에 개인적인 성화 과정에서 유지되기도 한다(엡 2:8; 빌 2:12). 성도의 성화 과정에서 유지된다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영적 행위가 반복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반복적인 사역은 성부의 구원계획과 성자의 중보 사역을 연결하였다. 이는 성부의 계획 속에서 의도되고 성자의 중보 속에서 준비된 관계가 성령에 의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성도의 ‘영적 관계’를 성화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오웬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가지는 모든 교제의 근원이며, 성도들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교제의 자리로 나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교제는 감정의 교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교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엡 2:18). 이는 성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도 성령의 사역을 따라 자신의 실존을 알아가는 방도가 된다. 여기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존귀하게 여긴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도를 존귀하게 여기므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보내어 먼저 찾아와 새롭게 변화된 ‘영적 관계’를 정립한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존귀하게 여긴 자에게 찾아와 은혜로 ‘영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오웬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안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반복적으로 죄를 죽이라고 한다. 성도가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시작된 ‘성령의 사역’을 따르며 자기 안에 내주하는 죄를 죽일 때, 타락한 습관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내면에 존재하는 죄의 근원을 물리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 ‘영적 관계’가 맺어진 성도도 ‘세상 영’의 유혹을 받아 때로는 ‘죄’를 이기지 못함으로 영적 관계가 소홀해지기도 한다. 이는 성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며 ‘죄 죽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이다.

오웬은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죄 죽임’ 교리를 다음의 두 가지로 정의하였다. 첫째, 오웬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네코우’(νεκόω)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오웬은 기본적으로 ‘죽이다’, ‘죽임으로 파괴하다’를 의미하는 이 단어에 ‘육체적으로 고유한 성향을 지닌 부패한 본성을 파괴한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한 ‘죄 죽임’이란 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을 약화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어서, 오웬은 롬 8:13에서 ‘죽음에 이르게 함’이라는 의미의 ‘데나토우테’(θανατουτε)에 주목한다. 그는 이를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어떤 다른 생명체가 힘, 세력, 그리고 그 자신의 원리를 소멸시키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도가 죄를 죽인다는 것은 성도의 내면에서 죄를 약화해 소멸하게 만들고, ‘세상 영’이 자기 나름의 작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영성’이다. 여기에서 완전하게 죽이는 것이 원래 목표이기는 하나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약화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성도가 죄를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은 ‘죄 죽임’의 본질이다.

또한, ‘죄 죽임’은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서 항상 일어나야 하는 지속적 의무를 부여한다. 삼위일체의 지원을 받으며 그 길을 따르는 자에게 성경 말씀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 하였다. 오웬은 이 말씀을 기초로 ‘죄 죽임’의 과정을 다섯 가지로 언급하였다.

첫째, 지켜야 할 의무인 몸의 행실을 죽이라 한다. 둘째, 의무를 지켜야 할 대상인 너희에게 ‘너희가 죽이면’이라 한다. 셋째, 의무에 동반된 약속인 생명을 얻어 ‘너희가 살리라’고 한다. 넷째, 의무를 이행하는 원인이나 수단인 성령의 사역으로 ‘너희가 영으로써 죽이면’이라 한다. 마지막은, 의무와 수단과 약속을 포함하는 진술로 ‘너희가 죽이면’이라 한다. 이때, 성도가 주어진 ‘죄 죽임’을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반복적 의무로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오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성도의 의무는 가치를 갖게 되었고, 효과를 보게 되었으며, 모범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으로 ‘교제’와 ‘죄 죽임’이 성도의 삶에서 반복되어 습관화되는 것은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더욱더 견고하게 유지하는 길이다. 이러한 일은 성도가 ‘성령의 사역’을 따르며 ‘영성’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방도이다. 다섯째, 오웬은 성도가 내면에서부터 정해진 방향을 따라 ‘영적 행위’(Duties of Divine Worship)로 개인의 고유한 ‘영성’을 드러내는 것을 주목하였다. 이 ‘영적 행위’는 ‘예배드리는 삶’(요 4:23)으로 ‘영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 영’의 주도적이며 개별적인 사역을 따르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영성’을 드러내기를 즐거워한다. 이는 실천을 강조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영적인 삶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웬은 성도가 순종하는 ‘영적 행위’를 ‘예배드리는 삶’으로 보았다. 여기서 ‘예배드리는 삶’이란 공적 예배 의식에 참석하는 것을 넘어, 성도의 삶 전부를 포괄하는 총체적 의미로서의 ‘영적 행위’를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규례를 따라 예배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의식적 예배 역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으로 규례를 따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성도라 하더라도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 ‘세상 영’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성도가 세상 원리를 따라 불의를 행하기도 하거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세상에 만족함으로 영적 안일함에 빠져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에 머물기도 한다(계 3:14~22). 또한, 일부는 영적 행위로 ‘하나님 영’을 따르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 영’이 부재한 상태에서 꾸며진 영적 행위이므로 아무리 똑같은 행위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와도 참된 ‘영적 행위’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영적 행위’란 성도 내면에서부터 이미 정해진 ‘영성’을 순종으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오웬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거룩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오웬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 24)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이 말씀은 ‘영적 행위’를 좀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도록 요구한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 때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주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주체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 곧 부름을 받은 성도로 어느 곳에서나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자이다. 또한,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삶이고,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말씀을 따르는 ‘영적인 삶’이다. 이는 ‘영적 행위’가 ‘성령의 사역’을 따라 드러나는 ‘영적인 삶’이다. 즉, 이는 정해진 규례를 따르거나, 단회적이거나, 특별한 시간에만 나타나는 성도의 부분적인 삶이 아니라 총체적 삶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웬은 ‘영적 행위’를 포괄적인 의미에서 ‘예배드리는 삶’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인 ‘영적 행위’로 순종하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개인을 향한 거룩한 뜻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에게 명령한 ‘영적 행위’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외면적으로 그들은 똑같은 태도와 양식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한 사람은 영적 원리를 따랐고 한 사람은 영적 원리를 따르지 않았다. 이는 ‘영적 행위’의 주체가 ‘성령의 사역’을 따랐는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 개인의 내면에 거룩한 의무를 실천하려는 성향과 거룩한 의무를 대적하려는 성향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은 영적인 능력을 덧입지 않는 한, 어떠한 영의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곧 성도가 참된 ‘영적 행위’를 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실제적인 도움과 조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웬은 성도의 ‘영적 행위’에서 주도적이고 개별적인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를 지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미 말한 것처럼, 설사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라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한 ‘영적 행위’를 지속해서 유지하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거룩하게 된 제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생명력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 누구도 영적인 행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곧 하나님의 충분한 지원을 받을 때만 성도는 참된 ‘영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논의이다. 이제, 성도가 성령의 주도적이고 개별적인 역사를 따라 ‘영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성도가 내면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위해서 받은 생명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웬은 성도가 은혜를 따르는 영적 행위와 개별적으로 부여된 선한 의무를 감당하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 영’의 사역이라 하였다.58) 이는 ‘칭의’로 영적 마음가짐의 정서에서부터 전적인 은혜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말씀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하며,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 성화의 과정을 따라 성도를 훈련 시킨다. 또 성도가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성경적 근거들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빌 3:3), ‘성령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골 1:8),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 엡 1:17; 행 19:31; 롬 5:5; 8:15, 22, 26; 살전 1:6; 롬 14:17; 15:13, 16). 주어진 말씀을 따라 성도가 참된 ‘영적 행위’를 하려면 내적으로 의지가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에서 오웬은 하나님만을 바라는 ‘신앙’과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는 ‘신학’과 그에 따르는 ‘신행’으로 전인적인 ‘영적 행위’를 제시한다. 전인적인 영적 행위에서 성도의 ‘신앙’은 정서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태도이고, ‘신학’은 지성적으로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적기능이며, ‘신행’은 의지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실천이다. 따라서 성도가 ‘성령의 사역’을 따르며 드러내는 ‘영적 행위’는 반드시 그 증거를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영적 행위’들이 ‘성령의 사역’을 따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경우들도 있다. 이는 사람들이 내면의 ‘영성’을 무시하고 결과에 치중하거나, 개인의 목적을 위해 꾸며진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영성’을 견고하게 정립하여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또한, 참된 ‘영성’은 성도가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영적 행위’로 새로운 생명을 얻고 평안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오웬은 성도가 영적 행위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닮아가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을 성도의 최상의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면 환란을 넉넉히 극복하게 된다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대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해야 할 이유이다(고후 4:8-9, 16-18). 따라서 오웬은 ‘그 생각이 하늘에 속한 것을 향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Crux nil sentit in nervo, dum animus est in coelo)라 하였다. 이러한 ‘예배드리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성도의 삶에서 ‘영성’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방도이다.

제 3장 결론

본 연구는 오웬신학에서 ‘영성’에 관한 탐구로, 배후에는 영적 실천에 관한 연구자의 관심이 놓여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연구는 일부 성도들이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영성’을 무시한 채, 외적 결과에만 치중하는 경향을 되짚어 보려는 시도이다. 이는 성도 내면에서부터 ‘영성’을 바르게 정립하고 이것이 외면의 삶으로 ‘영성’이 드러나게 하려는 하나의 노력이다. 또한,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유는 개인이 내면으로부터 예배드리는 삶으로 ‘영성’을 드러내는 첩경에 자발적인 참여를 하면, 개혁의 연속성과 탄력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성령의 사역’을 따르는 ‘영성’의 맥락을 이루는 본 연구가 혼란한 ‘영성’에 이끌려 성과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성도가 내외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따라 ‘영성’을 견고하게 정립하여 생명과 평안을 얻는 데에 나름의 소임을 감당하기를 소망한다.

문형진 박사(기독교학술원 연구원)

*본 논문은 제86회 기독교학술원 월례포럼에서 발표되었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