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율법에서 속량받으라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한다(롬 7:4)’ 혹은 ‘율법에서 속량받는다(갈 3:13)’는 말은 율법을 무시한다거나 율법을 폐한다는 말이 아니다. 율법은 영원하기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다(마 5:18).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는 것은 그것을 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여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를 대신해 ‘죄삯 사망’을 갚아 주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된다.

이를 성경은 다양하게 표현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롬 7: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종합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죄값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가 내게서 이뤄지면(의롭다함을 받으면), 내가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약 율법에 ‘오살자(誤殺者)’가 ‘도피성(a city of refuge, 逃避城)’으로 피난하여 죽음을 면한 것은(신 19:2-3), 죄인이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께로 가면 ‘율법’에서 해방받는다는 것을 예표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도피성인 그리스도’를 예비하셨다. 누구든 그에게로 가면 의롭다 함을 받아(롬 10:4) 율법에서 해방된다. 반대로 누가 아무리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려 하고 또 이를 위해 온갖 일을 해도,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는 한 다 부질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구원받고 싶다면서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고, 끝없이 ‘달라 달라(give! give!) 보채는(잠 30:15) 율법 아래’로 들어가 정죄받기를 자청한다. 이는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잠 7:22)”과 같다.

이 점에서 ‘파멸’과 ‘구원’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성경은 여기서 진일보해, ‘스스로 구원하라(렘 51:45)’고 까지 말한다.

은혜에 의존된 전적 무능한 죄인에게 가당치 않은 말로 들리나, ‘정죄의 율법’아래서 나와 ‘구원인 그리스도’께로 가라는 말이다. 선택은 자유이나 그것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한다.

복음 전도의 핵심 내용인 ‘예수 구원(막 16:16) 불신 지옥(계 21:8)’은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고, 안 믿으면 율법의 정죄를 받는다’ 는 뜻에 다름 아니다.

◈율법에서 속량됨으로 잉여의 삶이 시작됨

‘율법에서 속량받았다’는 것은 ‘죄의 빚을 청산’하고 ‘잉여(surplus, 剩餘)의 삶’을 살게 됐다는 말이다(속량이란 ‘빚을 갚는다 혹은 탕감받는다’는 뜻이다). 시쳇말로 ‘손익 분기점(break-even point)에서 ‘흑자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는 말이다.

반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죄값 사망(롬 6:23)’이라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1만 달란트의 빚을 진 채무자(마 18:24)와 같다. 아무리 갚아도 잔고 정리를 하면 언제나 ‘부족이라는 경고음’과 함께 ‘사망’을 선고받는다(롬 7:5)’.

성경이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율법과 결혼해 사망의 열매를 맺은 자(롬 7:5)’로,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한 자’를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와 연합해 의의 열매를 맺는 자(롬 7:4)’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

전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영원한 결핍과 그로 인한 사망’을, 후자는 ‘율법에서 해방된 자의 잉여의 삶’을 말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그리스도’를 주춧돌(벧전 2:6)에 비유한 것도 그가 삶을 세우는 기저(basis)가 된다는 점에서이다. 반면 ‘율법 아래 있는 인생’은 기저(basis, 基底) 없이 허공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희랍 신화(Greece myth)에 나오는 ‘다나오스(Danaos)의 딸들’이 그들의 죄과로 영원토록 ‘밑(bottomless) 없는 물통에 물을 길어 붓듯’, 기저 없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삶은 허공을 휘젓다가 마는 무(nothing, 無)로 귀결된다.

이스라엘이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죽기 살기로 일했지만 수고하는 쪽 쪽 다 바로에게 귀속되고 ‘자기 몫’으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듯,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삶도 모든 것이 ‘율법이라는 블랙홀(black hole)’에 빨려 들어가므로 ‘잉여’가 전무하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슬픈 운명이다. 누가 아직 율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삶을 시작도 못한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을 받을 때, 비로소 그의 인생은 ‘영원한 마이너스’에서 ‘제로 베이스(zero base)’가 되어 그 위에 뭐든 쌓이게 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해방자 그리스도(롬 8:2)’는 흑자 인생을 열어주는 시발점(starting point)이다. 하나님이 “소자에게 냉수 한 잔 떠 주는(마 10:42)” 우리의 사소한 신행(信行)도 상을 주시는 것은 그것이 ‘율법의 빚’이 청산된 ‘제로 베이스’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설사 누가 ‘율법 아래서’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했어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고전 13:3). 이는 그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It’s like a bottomless pit)’로 그것을 고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속량됨으로 영적인 삶이 시작됨

‘율법에서의 해방’은 단지 ‘잉여(surplus, 剩餘)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기저(the basis of life)’만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변환, 곧 ‘거듭남(重生)’을 야기한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로의 변환’을 일으킨다. 율법 아래 있던 자가 ‘육에 속한 땅의 사람’이었다면, ‘율법에서 해방된 자’는 ‘영에 속한 하늘의 사람’이다(요 3:6).

스데반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행 7:51)”고 꾸짖은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미중생한 육의 상태’를 두고 한 말이다.

성경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마엘’과 ‘약속 아래 있는 이삭’을 ‘육신을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규정한 것은(갈 4:21-29) ‘율법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육의 사람이냐, 영의 사람이냐’로 갈린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음이 율법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된다(갈 3:2)’고 한 것도 ‘성령과 율법의 상극성(相剋性)’을 말한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는 말씀 역시 ‘성령과 율법의 좁힐 수 없는 간극(間隙)’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에게 성령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성령이 없는 자들(유 1:19)’, ‘성령을 거스리는 자(행 7:51)’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율법주의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역시 성령의 부재로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때문이다.

자신들만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자처했던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 받은 것(마 22:29)”은 그들에겐 말할 수 없는 모욕이지만 당연한 귀결이다.

율법 아래 있어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니 ‘삼위일체 하나님’도 ‘성경’도 ‘구원의 도리’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산적(山積)한 성경 지식도 유구(悠久)한 신앙 전통도 없지만,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것들을 모두 안다. 이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아는 자들이 복되도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