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 S. 루이스 | 김선형 역 | 홍성사 | 208쪽 | 11,000원

문학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가장 쉽게는 ‘이야기’입니다. 문학에 속하는 소설, 수필, 시 등은 모두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같은 주장이라도 이야기에 넣으면 전달력이 커집니다.

가로등을 신설해야 한다고 해 봅시다. 단순히 ‘가로등을 설치해야 한다’고만 주장하면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예산이나 축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공부하느라 밤늦게 귀가하는 우리 자녀들이 안심하고 안전할 수 있고, 기다리는 부모도 조금이라도 덜 불안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라는 이야기를 넣으면, 더 호소력이 짙습니다. 이것이 문학이고 문학의 힘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편적 정서를 ‘대중성’이라고 합니다. 문학은 대중성 있는 대표적인 장르입니다. 대중성은 ‘넓이’를 말합니다. 평면으로 퍼져 있는 크기입니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깊이’입니다.

어느 종교든 깊이가 없으면 오래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깊이만 있어서는 오래갈 순 있어도, 멀리 퍼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오래 사랑받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된 건, 기독교라는 깊이에 젖어든 사람들이 희생과 헌신, 기적들을 보았고, 이것들이 ‘이야기’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타인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을 믿고 갈망하면서 나의 이 모습에 또 다른 타인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의 연쇄 작용’으로, 기독교는 특수성(깊이)과 대중성(넓이)을 확보하게 된 겁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이 책은 1961년 출간되었지만, 서문에 보면 1941년 7월 5일에 쓰여졌습니다. 80년 가까이 된 겁니다.

책은 노련한 악마 스쿠르테이프가 조카이자 어린 악마인 윔우드에게 전하는 31통의 편지입니다. 작가는 유명한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쓴 문학가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완벽한 기독교 문학’이라는 겁니다. 기독교가 갖는 깊이를 문학이 주는 넓이에 아주 최적화되어 담아내었습니다.

31통의 편지에서는 단 한 줄도 ‘신을 믿으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악을 가까이 하고, 어떻게 해야 신과 멀어질 수 있는지를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역설(逆說)이 신을 더 믿어야 하는 당위성을 주고, 신을 제대로 믿으라는 역설(力說)이 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길지 않습니다. 보급판으로 나온 책이나 양장으로 나온 책이나 200쪽이 간신히 넘는데다, 31개의 장도 짧아서 아무리 책을 느리게 읽는 사람도 하루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두 달 동안 읽었습니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어느 심리학서보다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고, 어느 신학서보다 교리를 확실하게 전하고 있으며, 어느 문학서보다 문장의 유려함이 높기 때문입니다.

책을 빨리 읽는 걸 좋아하는 저인지라 아는 내용은 빨리 넘어가는 편인데, 이 책은 어느 때는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또 어느 때는 한 문장을 읽고 책을 덮어서는 가만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차 있고, 사람의 민낯 세상의 속성을 기가 막히게 잘 짚어내고 진단하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상평을 쓰고 있지만, 저는 아직도 이 책이 담는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걸 미리 밝힙니다.

줄 친 문장만 따로 엮어도 작은 소책자가 나올 정도입니다. 이 길지 않은 책에서 말입니다. 또 이 책은 작가가 문학가답게 여러 문학서들을 인용하고 있어, 책의 확장성 면에서도 좋습니다.

C. S. 루이스
여기에 몇 문장을 옮겨 보겠습니다. (인용한 글의 페이지는 보급판이고 여기에 나오는 ‘원수’는 하나님이고, ‘환자’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수가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기에 불안과 걱정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원수는 인간들이 현재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 바라지만 우리 임무는 장차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46쪽).”

“오로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미래의 일들에만 줄창 매달려 있도록 조처하는 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일들이야말로 제 십자가라고 믿게 만들거라(47쪽).”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이런 조건에 사는) 더 그렇지(56-57쪽).”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요즘 같은 때엔 식은 죽 먹기야) 적당한 성경구절에 관심을 끈 다음,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 예전 감정을 회복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계속하도록 부추길 수만 있다면, 게임은 끝난거나 다름없어(67쪽).”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험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라구(95쪽).”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부추길 만한 가치가 있지. 인간들은 노상 제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천국에서 듣든 지옥에서 듣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인간이 그런 우스운 소릴 계속 떠들게 하는 게 우리 일이야(140쪽).”

읽을수록 놀랍습니다. 무엇보다 심대한 교리와 진리를 서간문에 담으니, 전달력이 크고 충격도 큽니다. 우리가 왜 신을 멀리하고, 신 외에 것을 탐하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가 은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바라기는 이 책의 분량이 짧다고, 또는 어렵다고(교리를 다루고 있는데다 한 문장에 여러 의미를 담고 있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빨리 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읽고 곱씹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31통의 편지로 되어 있으니 하루 한 장씩, 한 달에 걸쳐 읽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일 년에 12번 읽는다면, 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될 겁니다.

또 출판사에게 바라기는, 이 책은 장마다 마지막 부분에 묵상할 코너를 만들어 보강하거나, 쪽성경처럼 장을 나눠서 출간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은 쓰기는 80년, 책으로 나오기는 60년이라는 사실을 볼 때 더 놀라게 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놀라운 마음과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이만한 기독교 문학서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아쉬움은 이 책에 대한 가치를 되새기며 다시 읽기 위해 책장을 펼치면서 달래게 됩니다.

처음에 알려드렸듯, 저는 이 책을 완전하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완전하게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미진한 감상평은 여러분이 읽어서 채우시길 바랍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