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클래식에 익숙해지는 데는 단계가 있다. 특별히 대중음악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이 처음부터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하이든(Franz Joseph Haydn),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을 듣는 것은 무리이다. 대개 클래식과 친근해지기 위해 처음 접하는 음악이 밝고 경쾌한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를 섭렵하면 베토벤으로 나아가고 베토벤을 섭렵하면 하이든, 헨델로 나아간다(이는 순전히 내 개인의 기준이다).

오늘 ‘교회음악’과 함께 연관지어 생각해 보려고 하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노가다’를 뛰고도 품삯을 제대로 못 받고 낙심천만하여, 소주 한 잔 걸치니 유년적 믿던 하나님이 생각나,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을 흥얼거리며 교회로 발길을 향했다. 그런데 예배당 입구에서 들리는 찬송이 음계, 가락, 리듬이 전혀 낯선, 시쳇말로 ‘듣보잡’이었다면 화들짝 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려버렸을지 모른다.

교회 음악을 엘리트화하므로 사람들을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경우의 이야기이다. 소위 수준(?) 있다는 대형 교회들은 음대 교수나 전문 음악가들을 성가대 지휘자로 세워 프로페셔널한 고급(?) 성가들을 연주하도록 한다. 물론 대중적이고 은혜로운 찬송가를 연주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과연 저 곡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회중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인상을 주는 교회들이 다수이다. 성도들의 그런 낌새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휘자는 꿋꿋이 ‘성가대의 수준’은 곧 ‘교회의 수준’이라며, 회중들의 음악 수준을 지휘자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이다. 음악 엘리트주의의 폐단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일반 찬송가나 복음성가는 인공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가 영적 건강에 안 좋으므로, 칼빈(John Calvin)의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고집한다. 우리 집사람의 자연주의(自然主義) 식단 논조와 비슷하다. 집사람은 가족들로 하여금 인스턴트 음식은 아예 들먹이지도 못하게 한다. ‘브로콜리(broccoli)’를 상에 올릴 때마다 도리질하는 나를 보고 ‘인스턴트 음식만 좋아하는 완전 초딩 입맛’이라고 핀잔한다. 그렇게 수없이 그 소릴 듣지만 여전히 브로콜리와는 안 친하다.

이는 아마도, 어머니가 어렸을 때 귀한(?) 아들이라고 귀한(?) 설탕을 많이 먹여 단맛에 길들인 때문인 듯하다. 지금은 설탕이 성인병의 주범으로 냉대를 받지만, 내 소싯적엔 설탕이 제법 고급식품이었다. 전 국민이 사카린(saccharin), 당원(glycogen) 맛만 알던 때에, 삼성 창업자 고(故) 이병철(1910-1987) 회장이 설탕을 수입해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설탕을 맛보게 해 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때의 그 맛은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으며, ‘이런 귀한 것을 공짜로?’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전 국민을 설탕 맛에 길들여 그의 소비자로 만들려는 고도의 상술이었다. 사실 삼성은 설탕과 모직(毛織)으로 일으킨 기업이기도 하다. 지금도 3복 더위에는 찬물에 설탕을 넣은 국수가 생각이 날 정도로 설탕은 내 유년을 사로잡았던 마법이었다. 나이 70을 바라보지만 난 여전히 초딩 입맛이고, 자연 음식에는 아직도 도리질이다. 어렸을 때의 입맛이 평생 간다는 말도 맞고, 사람은 평생 철부지라는 말도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우리 집 밥상을 보면, 자연주의(自然主義)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것 같다. 브로콜리 위에 마요네즈도 뿌려지고 아주 가끔씩 햄(ham)도 올려진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도 안 먹으면 소용 없으니, 그렇게라도 먹는 것이 백배 낫다‘는 상식을 뒤늦게 체득한 듯하다. 그런 아내를 보며,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게 쓰디 쓴 한약을 먹일 때 달달한 사탕을 입에 넣어 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어머니의 사탕발림을 요즘 아내에게서 다시 본다.

개혁신학을 사랑하는 목사님들이 모이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칼빈(John Calvin)의 ‘시편 찬송’을 불러야 할 당위성들을 웅변한다. 지당하다. 실제로 칼빈 찬송을 불러보면 절로 경건해지며, 오직 하나님께만 몰입시키려는 칼빈 선생의 정신이 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그것과 친해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는 주장엔 쉬 공감하지 못한다.

얼마 전 교회 안에 기타, 드럼 같은 소위 대중음악 악기들을 두는 것을 비판했던 어떤 분이 호되게 당하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꼭 그렇진 않겠지만, 그 비판이 경건을 내세운 일종의 ‘음악 엘리트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클래식에만 길들여져 있어 대중음악은 못 듣겠다며 고상을 떤다. 그들을 보면 식상하다.

기독교 입문 전, 소년 시절 나는 나훈아, 남진, 크리프 리처드, 비틀즈, 톰 존슨, 엘비스 프레슬리에 심취했다. 어머니가 즐겨 부르셨던 ‘노들강변’ 같은 민요, 아버지가 자주 읖조렸던 ‘청산리 벽계수야’ 같은 시조도 좋아했다.

군악대에 입대해선 가곡과 클래식에 입문했다. 처음 신입병 시절엔 매일같이 연습해야 하는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의 ‘핀란디아(Finlandia)’,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의 ‘천지창조(The Creation)’,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메시아(Messias)’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평양냉면처럼 무덤덤하게 익숙해졌고, 후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차이코프스키(Peter I. Chaikovsky),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 비발디(Antonio Vivaldi)도 좋아하게 됐다.

그 중 밝고 경쾌한 모차르트가 단연 1순위이다. 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는 별로 안 친하지만, 그가 모차르트와 하이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선 그에게 조금 더 친근감을 갖게 됐다. 참 묘한 심리다.

이런 일련의 음악 유랑은 나로 하여금 ‘음악 잡식가(雜食家)’로 만들었다. 지금도 난 여전히 어느 한 장르의 음악에만 묶여 있지 않다. 목사가 된 지금도 소년 시절 익숙했던 대중음악이 들리면, 그 시절 감성이 깨어난다. 내 의지는 ‘목사는 이런 세속적인 음악에 반응하면 안돼’ 라지만, 익숙한 내 유년적 감성은 이미 거기에 젖어있다. 섭생(攝生) 습성처럼 음악도 어렸을 때 애호했던 것이 평생 가는 듯하다.

이런 탓일까? 내게는 대중음악은 천박하고 클래식은 고상하다는 생각 따위는 없다. 내가 부르는 찬송에 꺽기(?)가 다반사임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인들 왈 “우리 목사님 찬송의 ‘꺽기(?)’는 감칠맛이 있다”고 한다. 수년 전 예배 때 강사로 모신 한 신학대학 교수님은 내 찬송을 듣고선, ‘목사님 찬송은 아주 독특하다’고 했다. 아마 나의 심한 꺾기(?)를 애둘러 표현한 것 같다.

나의 목회 여정을 돌이켜 보면, 교조적(dogmatic) 성향을 띠었던 초기 목회 때는 소위, 송영(頌榮)에 해당되는 찬송가 70장 이전의 것만 주로 불렀고, 아예 복음성가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며, 복음성가를 부르는 교회들을 ‘날라리’로 단죄(?)했다. 그러다 나름의 은혜를 체험한 후, 복음에 대한 보다 깊은 각성과 함께 인간 이해의 폭이 넓혀졌고 신학적 지평도, 찬송에 대한 이해도 넓혀졌다.

또한 성령은 과거에만 묶인 분이 아니시고 ‘지금 여기(now, and here)’, 바로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인격자이신 그 분은 개인의 현재의 처지, 지정의(知情意) 모두를 공감하시고 주관하는 분임도 덩달아 깨달아졌다.

한 마디로, 찬송은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과 자신의 정서를 떠나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그의 찬송이 그 모든 것들의 조합으로 형성된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now, and here)’를 초월한 감성으로 찬송을 부르라 하면 당황스러운 것이다.

물론 찬송가는 아무렇게나, 함부로 만들어지고 불려져서는 안 되며, 언제나 신학적 조망 아래 존치(存置)돼야 한다. 이는 찬송은 설교 이상으로 중요하며,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가사는 두말 할 것 없고 음계, 화성, 리듬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작성돼야 한다. 찬송이 타락한 인간의 감정을 배설하는 배출구 역할을 하게해서는 안 된다. 찬송에는 성령도 역사하시지만 사단도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자요 교회 음악가였던 루터(Martin Luther)는 천상의 타락한 천사가 세상에 내려와 역사하는 곳이 ‘성가대’라는 말을 했다. 교회 음악이 신중하게 취급돼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신학자는 ‘사단은 인간을 타락시키는데 음악을 택했다’고 한 말 역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음습한 이슬람적(Islamic) 음계, 한(恨)이 담긴 한국의 민속음계는 영혼을 어둠에 묶는다. 그런 음계에 찬송을 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극감(極感)의 정서를 발분시키는 지나치게 강한 비트(beat)의 락(rock) 같은 것도 피해야 한다.

반면 지나치게 감정을 억압하는 금욕주의적인 찬송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구태여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같은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지정의의 하나님은 인간의 감정 분출을 당연시하신다. 또 이미 언급했듯, 그 시대가 가진 독특한 정서를 억압시킬 필요도 없다. 그 시대의 희노애락의 정서를 찬송 속에 녹여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양시킨다면 찬송 양식은 불문할 만하다.

동시에 아무리 클래식하고 기품 있어보이는 곡일지라도, 그것이 단지 인간의 감성만 터치하고 예술성만을 고양시켜 자아를 확장시키는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찬송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찬송이나 음악은 감동이 클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뉴에이지(New Age)’ 음악을 경계하는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뉴에이지’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간관을 고취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음악, 문학, 예술, 과학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시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곧 문화로 그리스도 신앙을 대치하도록 만든다. 종교다원주의적 설교가 판을 치는 이유 중 하나에, 이런 뉴에이지적인(New Agic) 교회 음악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첨언하고자 한다. 첫째 찬송에서 소외되는 회중이 없도록 해야 한다. 회중들 가운데는 클래식 애호가들도 있지만, 대중음악 취향자들도 있다. 후자에겐 당연히 복음성가가 더 친숙하다. 그들에게 클래식한 것들만을 강요한다면 그들은 회중 찬송에서 소외될 것이며, 어쩌면 교회에서도 소외당할지 모른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신데, 음악 때문에 교회에서 소외당하는 자들이 있게 해선 안 된다.

둘째, 회중들의 찬송 기호(嗜好)에 등급을 매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김치찌개나 된장을 좋아하는 사람을 저급하다 하거나, 스파게티나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이들을 고급지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사람 입맛에 따른 식성(食性)일 뿐이다. 이미 고인(故人)들이 된 김영삼 대통령은 칼국수를 좋아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시레기 된장국을 즐겨먹었고, 정주영 회장은 자장면을 좋아했다. 다 서민 식품들이다. 그들이 서민식품을 좋아했다 해서 서민은 아니었다.

마찬가지 원리이다. 칼빈 찬송이나 클래식한 찬송을 좋아하는 사람을 고급지다거나 복음성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저급하다고 등급을 매길 수 없다. 꼭 등급을 매겨야 한다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복음을 칭송하는 찬송만이 고급이다. 그 외에는 클래시컬(classical) 하든 대중적(public) 이든 다 거기서 거기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복음 신앙을 고취시킨다면, 형식이 대수이겠는가? 설교가 그렇듯, 교회 음악을 재단(裁斷)하는 잣대도 오직 ‘복음적이냐 아니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