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지난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앞세워 군 입대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한 사유’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면 현재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근무하는 청년들과 이미 제대한 분들은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어떤 나라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거나 하다 못해 출장을 가더라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학도병으로, 군인으로 자원입대하여 희생했던 분들 역시 양심도 없는 분들인가요? 참으로 이상한 논리입니다. 14년 전 판결과 지금의 판결이 왜 다른가요? 그 때 판결했던 법관들은 양심이 없었고, 지금의 법관들은 양심이 충만한 사람들인가요? 여러 가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도 다윗을 알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추앙 받는, 바로 다윗 왕 말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째 아들이며, 막내로서 주로 목동 일을 했습니다. 당시 늘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스라엘 동쪽 서해안 지역에 살고 있었던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블레셋은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해당하고, 지금도 그 민족은 이스라엘과 공존과 다툼을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상 언제나 블레셋 과의 전쟁에서 늘 패하고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자녀를 잃었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도 아들들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갔지만, 패하고 참혹하게 전사했습니다.

블레셋은 지금의 에베스담밈 골짜기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은 엘라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양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군은 40일간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군인 골리앗 장수와 싸울 위인이 없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아군의 진지를 찾아왔던 어린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를 욕하고 조롱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나아가서 적의 장수인 골리앗을 물리치겠다”고 사울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이에 모두가 어린 다윗을 걱정한 나머지, 조용히 돌아가기를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계속해서 욕하고 능멸하는 저 할례 받지 못한 골리앗의 조롱에,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누구하나 나서는 자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 소년 다윗은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 다섯 개로 적장을 향해 달려가,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다윗의 용기와 용맹에, 적장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이런 역사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데, 그 무엇이 두렵고 걱정이 될까요? 군대를 가지 않는다 해서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일까요? 정말로 신실한 하나님의 아들들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사탄의 괴수 앞에 두려워 쩔쩔매는 어른들을 목격한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라가 위태로운데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서 두려워는 어른들을 뒤로 한 채,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은 무엇이 두려워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하는지요! 병역의 의무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다윗의 형들 같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다윗의 형들은 자신들은 나서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다윗에게 ‘전쟁을 구경하러 왔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1412-1431년 살았던 프랑스 잔 다르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잔 다르크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부여받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위기를 맞은 프랑스를 구해낸 인물입니다. 16세의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 승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잔 다르크를 모함하여 화형에 처하고 맙니다. 종교 권력층 사람들은 당시 기독교 질서뿐 아니라, 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걸림돌이 되고 위협을 주는 인물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를 화형에 처합니다. 가난하고 배경 없는 잔 다르크를,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이단으로 내몰아 죽인 것입니다.

병역을 ‘양심에 의해 ’거부한다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러한 일에 대해 과연 뭐라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군대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됐던 어린 소년 다윗과 소녀 잔 다르크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 싸운 것에 대해, 무슨 변명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지 않았을까요?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매우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국방의 의무를 법으로 정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소수 종교인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승인한다면, 1천만명의 기독교들은 과연 양심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타 종교인들도 양심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모든 국민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그리고 국방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법이 정해 놓은 4대 의무를 공명정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도 중요하지만, 나라는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나라 없는 신앙생활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임을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이미 깨달았고, 6·25 전쟁 때 겪은 공산당의 참혹한 핍박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최고의 사법 기관인 대법원에서 이러한 판결을 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들은 어느 나라 사법기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도 이를 수수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서서 나라를 위해 외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는 여야가 없고 남녀노소가 없으며, 전 국민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어야 합니다. 장애인이나 기타 나라에서 정하는 피치 못하는 사유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병역을 필할 수 있는 제도가 엄연히 있음에도 굳이 군에 가지 않으려는 소수의 종교인들 때문에, 국가의 최고 사법기관의 정의와 신뢰도가 함께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동성애자와 무슬림의 등장, 간통죄 폐지와 학생인권조례까지…, 이러한 교육과 제도 속에서 지금의 어린 학생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하는데, 갈수록 자유민주주의는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참으로 답답합니다. 국가기관에서 사람들이 바뀔 때마다 법이 바뀌면, 이 나라의 미래는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미래가 아닌 과거에만 매달리다 보면 결국 망하는 날이 머지 않을 수 있고, 국가 경쟁력에도 크게 손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있어 누구나 예외 없이 철저히 행하는 백성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