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상선벌악과 양심에 근거한 율법주의(윤리) 종교는 심오한 종교 관념 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연산 종교는 생득적인 윤리와 양심으로 설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양심을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라 한 것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율법에 대한 이해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심지어 누구로부터 옳고 그름을 가르침 받지 않아도 본성적으로 율법 의식(意識)을 가집니다. 이 율법 의식은, 죄를 쫓는 원죄적 속성과 더불어 태생적입니다. 그리고 율법 의식이 태생적이라는 것은 조그만 어린아이들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그들도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느낄 때, 누가 뭐라고 책망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이와 달리 초자연적 이신칭의 교리는, 자연인의 종교 관념이나 인문학적 소양으로는 공감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신칭의를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고(고전 2:9-10)',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지는 비밀(엡 3:3)' 등으로 지칭한 것은, 본래 그것이 인간에게 생경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예수 믿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할 놀랄 일로, 또한 그 결과 망하게 될 것을 말했겠습니까(행 13:39-41).

바울 사도가 말한 영의 생각(롬 8:6) 이라는 것도, 흔히 상상하듯 영계를 주유(周遊)하는 신비가들의 영험(靈驗)한 생각이 아닌, 이신칭의를 받아들이는 거듭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생각은 타고난 것이 아니기에, 본성적인 생각에 의해 곧잘 공격을 받습니다. 예컨대 성령을 힘입어 이신칭의의 복음을 들을 때는 아멘 하지만, 본성의 지배를 받으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다시 율법주의 담장을 기웃거립니다.

바울이 이신칭의 신앙에서 율법주의로 회귀하려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 4:9)'고 책망한 것은, 율법주의에 대한 그들의 착근(着根)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또한 성령을 보혜사(증거자, 요16:26), 교사(요일 2:27), 상기시키는 자(요 14:26)로 일컬은 것도, 생득적으로 이신칭의에 낯선 이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이 담겨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신칭의를 일반의 종교 개념과 인문학적 지식으로 파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마치 '1+1=2'라는 초보 셈법으로 미적분을 풀려고 달려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면 곧장 허무맹랑한 교리로 치부해버리는데, 이는 마치 초등학생이 미적분이 이해 안 된다며 엉터리로 단정짓는 것과 같습니다. 이신칭의를 공격하는 칭의유보자들이 아무리 갖가지 이론들로 그럴 듯하게 자신들의 공격 논리를 포장하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초등학문인 율법주의요(갈 4:9) 사람 머리에서 나온 인문학적 지성입니다.

그런데 이신칭의를 구원의 도리로 인정하는 개혁주의자들 중에도, 이신칭의를 입문시에나 필요한 초보 교리로 간주하고, 고차원의 신앙으로 진입하려면 초보 입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역시 이신칭의에 대한 심대한 오해에서 비롯됐습니다.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입문 교리일 뿐더러 가장 고등한 교리이고, 신앙의 출발을 알리는 스타트 건(start gun)인 동시에 완성의 축포(gun salute)입니다.

바울이 산전수전 다 겪고 난 후 만년에 한 신앙고백도 다른 심오한(?)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갈 2:20)'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종 예수 믿음에 근착(根着)된 이신칭의의 여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벗겨도 벗겨도 새 속살을 내보이는 양파처럼, 언제나 새롭고 끝 간데 없는 비의(秘意)입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찬 236장)"라는 찬양 가사 그대로 입니다.

이신칭의를 전하는 일 역시 오직 성령을 힘입어 해야 합니다. 이는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전도자들의 공통된 전도 원리였습니다.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전한(벧전 1:12)',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전 2:4)'. 오늘날 이구동성으로 설교는 성령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설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신칭의가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나 청중은 언제나 "성령이 스승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진리를 알게 하소서(찬 506장)"라는 겸비함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이신칭의의 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연유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혹 이신칭의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나, 아버지와 아들을 믿는 3위일체 신앙이 이신칭의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는다는 다신론(polytheism) 신앙을 말한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삼위일체 신앙을 의미하며, 그 삼위일체 신앙이 의롭다 함을 갖다 줍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다(벧전 1:21)'고 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는 말씀 역시, 유일신 하나님 지식은 오직 성자 그리스도와 더불어서만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포괄하여 이신칭의를 풀이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배제된 유대교적 단일신 신앙으로는 이신칭의 신앙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일 아들의 공로를 통하지 않고 성부 하나님만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지 않기에, 이신칭의가 성립되지 못합니다. 이신칭의의 원조격인 구약의 아브라함 신앙도, 성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을 믿는(벧전 1:21) 삼위일체 신앙이었습니다. 그의 하나님 신앙에는 대속자 그리스도 신앙도 함께 더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다(갈 3:8)는 말씀 역시, 삼위일체에 기반 된 이신칭의 복음을 전해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신앙 역시 삼위일체에 근거한 이신칭의 신앙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행 2:34-35)".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2:27)'.

성자 그리스도를 배제시킨 단일신론자들은 이신칭의를 믿을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이에 비춰 칭의유보자들이 이신칭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삼위일체 신앙의 결핍 때문은 아닌가, 조심스러운 추정을 해봅니다.

물론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지만, 과연 그들이 삼위일체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의 완전함을 믿는지 회의가 듭니다. 정말 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삼위일체 하나님 아들의 희생이라는 것이 믿어진다면, 그 희생위에 뿌리박은 이신칭의 신앙을 값싼 구원이니 뭐니 하며 폄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신칭의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는, 하나님 사랑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준거 기준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이신칭의가 창세 전,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영생얻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영원 전)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예수님도 이신칭의의 계시 불허(不許)는, 불택자들로 하여금 깨달아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예수님이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신 이유도, 불택자들로 하여금 천국복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마4:11-12)'.

그리고 불택자들에 대한 이신칭의의 불허는 인간의 죄와 맞물려져,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큰 그림으로는 한시적으로 그들을 구원에서 배제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것이지만(롬 1:11), 작은 그림으로는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신칭의의 거부를, 목이 곧고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비난했습니다(행 7:51).

나아가 불택자들에 대한 이신칭의의 불허(不許)를-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사단의 개입을 통해 구현되게 하셨습니다. 먼저 그들의 죄로 인해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했고(엡 2:2), 이신칭의의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고(고후 4:4), 그 마음에 뿌리운 이신칭의의 복음을 빼앗도록 허용하셨습니다(마 13:19). 이신칭의의 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고전 1:23) 연유가, 바로 이런저런 원수의 훼방들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나 택자들에게는 창세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사랑과,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신칭의의 계시를 열어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